brunch

원시의 이름, 세계를 가르는 첫 걸음

규정된 존재들 2편 2장

by Mind Thinker


말이 생겼다.

호모 사피엔스는 더 이상 단순한 소리의 연쇄가 아니라,
대상을 지칭하고 타인을 호출하며, 관계를 지정하는 체계를 갖기 시작한다.

이제 인간은 주변 세계의 사물에 고유한 표식을 부여함으로써

‘저것’이라는 대상을 타자와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을 특정한 지시어로 ‘너’라 불러 상호작용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구체적 사물과 추상적 개념을 구분하는 ‘이것’이라는 인식 범주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세상은 구조화되기 시작했다.



브로카 영역의 점화

이 시기의 인간, 호모 사피엔스는 좌반구 전두엽 부위의 브로카 영역(Broca's Area)과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의 급격한 진화를 통해 복잡한 문장을 생성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언어적 진화는 단지 ‘말할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서,
세계를 분류하고 고정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안겨주었다.

“이건 먹을 수 있는 것, 저건 위험한 짐승,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동료.”

이처럼 말은 감각을 분절하고, 사물을 분류하며, 기대와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적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이제 단순히 대상을 느끼는 자가 아니라, 대상을 명명하고 기능화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름은 단지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름은 대상을 호출(call)하는 동시에 위치를 지정하는 행위다.

“너는 지금 여기 있어야 해.”
이 말은 ‘너’를 틀 속에 위치시키고,

‘너’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엄마, 학생, 교사, 죄인, 신 등'의 이름은 단순한 기능적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위치, 감정의 요구, 책임의 부여, 관계의 통제다.

이름은 곧 정체성의 틀이다.

존재를 특정한 의미망 안에 고정시키는 최초의 언어적 구조물이다.



원시의 이름들


인류 초기의 부족 사회에서 이름은 임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름은 단순한 지칭을 넘어, 개인의 기원과 운명,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과 관계, 그리고 초월적 질서에 대한 복종까지 포함하는 상징적 구조물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단지 ‘부르기 위한 표식’이 아니었다. 그 이름은 탄생의 시기, 꿈의 상징, 조상의 환생 여부, 별자리의 운세, 신의 계시 등 초월적 질서를 반영한 상징적 해석의 결과물이었으며, 동시에 그 이름은 삶의 궤도, 집단 내 위치, 행동의 가능 범위를 포괄하는 의미였다.


“너는 별의 꿈을 꿨다.” , “너는 전사의 피를 이었다.”


이러한 명명은 인간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탈주와 변형을 제한하는 의례적 통제 장치였다.
즉, 이름은 정체성을 ‘생성’하는 동시에, 가능성을 ‘봉쇄’하는 기능을 가졌다.


특히 부족 사회에서의 명명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사회적 위계와 역할을 구조화하는 언어적 장치였다.


샤먼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그는 공동체 내에서 신과 인간 사이를 잇는 중재자였으며, 종종 질병, 발작, 꿈, 이상행동을 통해 ‘다르게 태어난 자’, ‘신이 부른 자’로 지명되었다.

이렇게 선택된 샤먼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닌 ‘신이 거주하는 통로’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면 예언이 되고, 그의 병은 신탁이 되며, 그의 삶은 공동체의 요구를 수행하는 의례의 장으로 전환된다.


북미 나바호족에서 샤먼은 병든 자에게 새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질병을 치유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존재였다.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환생자인 린포체나 라마는 예언과 징표를 통해 과거 생의 이름을 되찾고, 그 이름을 통해 정체성과 역할을 계승한다.

이들은 이름을 통해 ‘시간을 건너뛰는 존재’가 되며 생과 사를 초월하여 존재의 지속성과 초월적 위계를 구현한다.


전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용기를 ‘타고난 자’가 아니라, 공동체가 그에게 ‘기대한 자’였다.
“그는 용감하다”는 감탄은 곧 “항상 용감해야 한다”는 규범이 되었고, 그 규범은 정체성이 되었다.
공포를 느낄 자유, 물러설 권리, 눈물을 흘릴 감정은 모두 금기되었다.
그는 언제나 앞장서야 하며, 위험 앞에서도 침착해야 하며, 전사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역할은 이름을 통해 부여되었고, 그 이름은 감정을 통제하며 존재를 규정했다.
샤먼과 전사는 단지 기능적 직책이 아니라, 존재의 구조 자체였다.


족장은 공동체가 부여한 상징적 명칭을 통해 통치 권위를 획득했다.
한국 고대의 ‘거서간’, ‘차차웅’, ‘마립간’과 같은 칭호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지배 권력의 상징적 언어였다.
아프리카 요루바족에서도 출생 순서나 신성한 징조에 따른 명명 체계가 존재했고, 이는 정치적 위계의 반영이었다.


여성은 주로 생식과 돌봄의 기능을 중심으로 명명되었다.
한국의 민속 전통에서는 아이의 생존을 기원하며 ‘개똥이, 쇠돌이, 버리(버려진 아이), 쌍치(둘, 쌍둥이), 똥칠이, 누더기...’ 같은 천한 이름을 일부러 붙이는 사례가 존재했다. 이는 악귀를 속이고 운명을 교란하려는 상징적 전략이었고, 동시에 여성의 존재가 주술적 보호자이자 생명의 담당자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이때 ‘어머니’는 사랑의 명칭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을 구조화한 역할 명칭이었다.


노인은 과거의 기억과 지혜를 담은 존재로 명명되었으며, 그 이름은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윤리 체계의 보증자 역할을 수행했다.
티베트에서 고승에게 부여되는 수계명은 수행의 위계, 정신적 권위, 존재의 무게를 반영하는 상징이 되었다.


결국 이름은
생존을 위한 사회적 장치이자, 존재를 감싸고 통제하는 상징과 권력의 복합체였다.

이름은 개인을 세계로 이끌었지만, 동시에 세계가 허락한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름은 문이었다.
들어가는 입구였지만, 나가는 출구는 없었다.




사람들은 보통 이름을 감정적 의미와 연결한다.

“할머니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그 이름은 내 유년기의 냄새와 함께 떠오른다.”
“그 사람 이름을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첫사랑의 계절이 다시 찾아오는 것 같다.”

이처럼 이름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름은 감정 자체가 아니다. 이름은 감정의 매개이지만, 그 본질은 사회적 구조물이다.

이름은 존재를 해석 가능한 언어 체계 속에 고정시키고, 그 언어 체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은 특정한 정체성, 역할, 기대를 동반한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단순히 생물학적 관계를 넘어서 양육, 보호, 책임, 권위 등의 역할적 기대를 내포한다.
‘죄수’라는 명칭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행동 가능성까지 제한하는 낙인이 되며,
‘시민’이라는 이름은 권리와 의무의 체계 속에 인간을 위치시킨다.


이름은 세상을 설명하고, 관계를 분류하며, 존재를 관리하기 위한 최소 단위의 질서 장치다. 그것은 인간을 인식 가능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인식 가능한 것 외에는 존재하지 못하는 자로 만들어버린다. 이 모든 이름들은 존재를 이해하게 만드는 언어인 동시에 통제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적 코드다.


자크 데리다는, “이름은 의미를 고정하지 않는다. 이름은 반복 속의 차이(différance)다.”라고 말한다.
이름은 정체성을 명확히 지정하는 듯하지만, 언제나 맥락과 시간에 따라 흔들리고, 달리 해석된다는 것이다.

한편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복잡성을 줄여야 한다. 이름은 그 최소 단위다.” 고 말하며 사회는 이름을 통해 존재를 단순화하고 처리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 두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사실을 의미한다.
즉, 이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자로 간주된다는 사회적 현실을 뜻한다.


결국, 이름은 존재를 의미화하는 동시에,

그 존재가 사회적으로 ‘통제 가능한 객체’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름은 인간이 협력하고, 신뢰하고, 보호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만든 생존의 체계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름은 역할을 고정시키고, 가능성을 닫으며, 존재를 하나의 틀에 가두는 억압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이름은 길이 되었고, 동시에 울타리이자 감옥이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