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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이끈 탈주자들

규정된 존재들 1편. 에필로그

by Mind Thinker

에필로그.

문명을 이끈 탈주자들.



역사는 고정된 질서에 순응한 자들에 의해 쓰이지 않았다.
그 역사는 늘 ‘틀 바깥의 존재들’,

주목받지 못한 존재들,

이해받지 못한 자들,
질문을 던지는 자들,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품은 자들,
아직은 희미한 가능성에 자신을 던진 이들에 의해 열려왔다.


그들은 언제나 지도를 찢고, 언어를 해체하고, 경계를 넘는 감각으로 움직였다.
그 한 걸음은 결정된 미래에 대한 신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정말 그럴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질문은 늘 경계에서 태어난다.
정의되지 않은 자만이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질문을 던지는 자만이 새로운 세계를 연다.



대륙을 건넌 자들 – 지도 바깥을 향한 상상


15세기말,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상의 끝이 어딘지 알고 있다고 믿었다.

지중해와 유럽 대륙, 아프리카 해안을 중심으로 세계는 ‘완성된 지도’처럼 여겨졌고,

그 바깥은 ‘미지’, ‘공백’, ‘위험’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지리적 한계를 넘은 이들은 ‘이곳이 전부’라는 믿음을 거부한 이들이었다.

콜럼버스는 ‘그 끝 바깥’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 확신보다,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정말 끝일까?”

이 질문은 지도에 없는 영역을 향한 항해였고, 지도 자체를 다시 그릴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또한 그 항해는 지리만이 아닌 존재의 경계를 넘는 사유였고 혁신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세계 인식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신을 의심한 자들


중세 교회는 ‘진리’를 독점했고, 그 진리는 라틴어라는 권위, 성직자의 해석권, 성서의 제한된 접근성 안에서만 유통되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의문을 제기했다.
“하느님은 정말 라틴어로만 말하는가?”
“신의 뜻은 왜 성직자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지는가?”

이 질문은 신의 언어를 민중의 언어로 이전시키는 신학 해체의 서막이었고,

단지 종교 개혁이 아니라 존재의 해석 권한을 되찾는 사건이었다.

루터는 신학의 내용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 신학이 작동하는 구조 자체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시작일 뿐이었다.
에크하르트는 교리를 넘어선 내면의 신성과 합일을 이야기했고,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며 "신은 교회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키르케고르는 믿음이란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실존의 도약이라고 보았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통해 모든 절대 가치의 해체를 요구했다.


그들의 사유는 “신이 있는가?”를 묻기보다,
“신은 누구의 언어로, 어떤 권력 안에서 존재해 왔는가?”라는 해석의 구조를 해체하는 시도였다.


이 흐름은 서구에 국한되지 않았다.

노자는 이미 기원전부터 ‘이름 붙여진 도(道)는 진짜 도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장자는, '존재는 이름 없이 더 완전하며 도는 해석이 아니라 감응의 대상이다'며 사유를 이어갔다.
그들에게 신(神)이나 도(道)는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말로 정의될 수 없는 존재의 근원적 흐름이었다.
도(道)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진리이며’, 그 불가해함 속에서 모든 존재는 이름 없이도 완전하다는 사유가 담겨 있었다.


불교의 공(空) 사상 또한 신의 존재를 중심에 두지 않으며, 모든 실체화된 언어와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무자성(無自性)', '무아(無我)'로 향하는 존재 해방의 길을 탐구한다. 이 역시 모든 고정된 실체를 의심하고, 해체하는 신학적, 존재론적 질문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단순히 “신이 존재하는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물었다

“왜 인간은 신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이해해 왔는가?”

“왜 초월적 존재는 항상 인간의 해석 가능성 안에 갇혀야만 했는가?”

“왜 신은 언제나 권력의 언어로만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종교적 회의나 단순한 신의 부정이 아니었다. 신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인식의 구조, 권력의 언어, 해석의 독점을 해체하려는 철학적, 존재론적 도전이었다.그리고 그 질문들은 하나의 전환을 만들어냈다.신은 더 이상 권력자들만의 해석으로 존재하는 지배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 신은 이제 민중의 언어로 말하고, 이름 없는 자들의 고통과 함께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소수의 권력자들의 신에서 민중의 신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신학의 내용을 바꾼 것이 아니라, 누가 신을 말할 수 있는가, 신은 누구의 편인가, 신은 누구와 함께 존재하는가, 더 나아가 무엇이 신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었다.




철학, 질문은 멈추지 않은 자들.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고 죽었다.
그가 위험했던 이유는 폭력적이거나 반역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언급되었던 모든 정의의 밑면을 물었고,
그 물음은 사회 전체가 의존하던 ‘정의된 것처럼 보이던 질서’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철학자들은 반복해서 질문했다.
“인간은 무엇인가?”
“존재는 고정된 실체(Static being)인가, 아니면 '존재가 되는(becoming)'의 흐름인가?”
“자유란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이름조차 없는 경로를 걷는 것인가?”

철학의 역사는 정해진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질문의 역사였고,
그 질문은 언제나 정체성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과학자, 질서를 의심한 자들


과학은 관찰이 아니라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뉴턴은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를 물었지만,
그보다 더 급진적인 질문은 코페르니쿠스였다.


“태양이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도는 것이라면?”
이 질문은 중세의 우주관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단지 천체의 움직임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세계 해석의 중심을 ‘인간의 감각’에서 ‘수학적 사유’로 옮긴 존재적 혁명이었다.

그리고 인류 전체의 존재 좌표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그 혁명을 다시 뒤흔든 또 한 명의 사유자가 있었다.
그는 스위스 특허청의 무명직원,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뉴턴이 정립한 절대적이고 불변이었던 시간을 의심했다.
그에게 시간은 더 이상 독립적이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그 자리에 ‘빛’을 절대자로 세웠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묶어 ‘시공간(spacetime)’이라는

새로운 존재론적 실체를 구성하며,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

이 선언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인식의 전환이었고,

그렇게 상대성 이론으로 물리학을 넘어 세계 인식의 패러다임을 다시 썼다.

그는 3차원의 고정된 세계를, 4차원의 가변적이고 비선형적인 우주로 확장시켰다.
그 순간은, 우주가 바뀐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린 순간이었다.


뉴턴과 코페르니쿠스, 아인슈타인과 다윈, 파인만, 로잘린드 프랭클린, 앨런 ...
이들은 모두 기존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을 감지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사유는 종종 비웃음을 샀고,
무시되었으며,
때로는 이단으로 처벌받았다.

그러나 과학의 진보는 언제나 ‘그럴 리 없다’는 상식에 대한 도전에서 시작되었다.
그 질문은 틀 안에서 이해되기보다,
틀을 무너뜨리는 규정되지 않은 시선에서 발생했다.



예술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감지한 자들.


언어가 붙지 못한 감정,
설명할 수 없는 시간,
이해되지 않는 고통,
예술가는 그것들을 말없이 그렸다.


고흐는 붓으로 존재의 불안을 휘갈겼다.

작품 제목조차 ‘무제’(Untitled)로 남긴 예술가들은,
말로 해석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보들레르는 아름다움이 도덕과 일치하지 않음을 노래했고,
뒤샹은 소변기(urinal)을 예술관에 가져다 놓으며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규정을 깨뜨렸다.

20세기 전위 예술가들은 작가명을 지우고, 작품명을 생략하며, 존재 그 자체로 말을 건넸다.


예술은 늘 정체성을 거부한 존재의 감각으로부터 태어났다.
그 감각은 해석되지 않아야 충만했고,
정의되지 않았기에 살아있었다.


그리고 또….



역사는 규정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의 질문이었다


인류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정의된 ‘보통 사람’이 아니다.
‘정상’이라는 말속에서 안주했던 이름들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 했던 자들,
이해되지 않는 존재로 존재하려 했던 자들,
그리고 기꺼이 해석되지 않는 삶을 선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질서를 무너뜨렸고,
언어를 해체했고,
역사의 방향을 바꿨다.


역사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질문은 언제나,
정의된 존재가 아니라,
정의되기를 거부한 존재로부터 나왔다.

인간은 규정되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하며,
이해받지 않을 때 가장 창조적이며,
이름이 없을 때 가장 광활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존재는 정해진 경로를 걸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스스로를 열어놓을 때,
가장 넓고 깊은 가능성으로 확장된다.

규정된 정체성을 내려놓고,
해석을 멈춘다.
스스로에게 이름 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설명되지 않지만 움직이는 존재가 된다.

규정되지 않은 자로 흐른다.
그 흐름 안에서,
상상보다 더 광활한 존재로 살아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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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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