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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만들지 않았다

규정된 존재들 1편: 3~5장

by Mind Thinker


3장. 나는 나를 만들지 않았다 –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나다.”
그런데, 그 '나'는 누구에 의해 구성되었는가?

나는 내 의지로 내가 되었는가? 아니면 내가 "되었다"라고 믿는 그 존재는 이미 나도 모르게 사회라는 시스템이 배치한 결과물일 뿐인가?


정체성은 자율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다.

“나는 이 길을 선택했어.”, “나는 이런 성격이야.”,“나는 여성이며,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어머니야.”
그러나 이 언어의 밑바닥에는 ‘나는 나를 선택했다’는 환상이 뿌리내리고 있다.


정체성은 선택이 아니다. 정체성은 구조적으로 주어지고 내면화된 것이다.

나는 태어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름이 주어졌고,

성별이 정해졌으며,

국적이 등록되었고,

언어가 주입되었다.
말보다 먼저 배운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나의 위치였다. 이 모든 구조적 요소는 선택 이전의 조건이었다


나는 ‘말’을 배우기 전에

남자답게 / 여자답게 말하라는 성별 언어 규범을 내면화했고,

‘걷기’ 이전에
어떤 색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떤 장난감을 들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도 전에
“남자는 울면 안 돼”, “여자애가 왜 그렇게 나서니”와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들으며, 감정 표현의 방식조차 규율된 틀 안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나’라고 느끼는 감각은 사실상 내가 통과해 온 구조의 흔적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궤적이다.

성별, 계급, 인종, 종교, 언어, 지역, 정치 성향, 신체 조건...
그 어떤 것도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며, 그 선택지가 나의 통제 아래 있었던 적도 없다.


사회는 나에게 ‘너답게 살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는 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는 이것 이상이 되지 마라.”


사회는 제한과 조건, 경계와 분류로 구성된 일종의 지도다. 그 지도는 내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표시하는 동시에, 벗어나지 말아야 할 길의 윤곽을 동시에 그려낸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아비투스(habitus)’라 불렀다. 아비투스란 사회 구조가 개인의 몸과 감정, 인지, 행동 양식 안에 새겨놓은 무의식적 구조를 의미한다.
인간은 그 구조에 따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며, 느낀다. 그리고도, 그 모든 것이 자기 선택인 줄 알고 살아간다.

“나는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야.”

“나는 이 옷이 좋아서 입는 거야.”

“나는 원래 이 방향이 맞아.”

이 문장들은 자유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가 제공한 선택지 안에서만 가능한 자기 설명이다.

자유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는 선택지를 누가 설계했는가에 대한 구조적 질문이다. 선택 가능성 자체가 이미 제한된 틀 안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그 안의 어떤 선택도 진정한 자율일 수 없다.


정체성은 그렇게 생산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아를 구성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시스템이 제공한 해석 가능성의 조합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제도적 장치들 '학교, 병원, 언론, 종교, SNS, 문화 콘텐츠' 는 인간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지속적으로 개입한다. 그리고 그 장치들이 제공하는 정체성의 언어들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를 규정하고, 분류하고, 위치를 잡는다.


어린이는 ‘착한 아이’, ‘문제아’, ‘모범생’, ‘조용한 아이’ 등으로 불린다. 이 언어들은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낸 범주적 명명이고, 그 명명은 반복되며 실체가 된다. 즉, 호명된 정체성이 실재를 만든다.


성인이 되면 그 구조는 더 복잡해진다.
학력, 직업, 연봉, 집, 차, 외모, 결혼 여부, 성적 지향, SNS 팔로워 수...
모든 항목이 정체성의 지표로 작동하고,
그 지표로 타인을 구성하고,
동시에 자신의 위치를 조정한다.


그러나 그 모든 평가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보다
나는 어느 범주에 속해 있는가’를 재확인하게 만든다.


왜일까?

그 질문 자체, ‘나는 누구인가?’는 자신을 구성한 구조를 의심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의 외부를 상상할 수 있을 때에만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인간은 구조 안에서만 살아간다. 그러나 그 구조가 우리의 감정, 감각, 언어, 자기 해석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비로소 인간은 그 구조로부터 조금씩 이탈할 수 있는 출구를 발견하게 된다.



4장. 정체성은 반복하며 고착된다


"그 애는 원래 그런 애야.", "나는 원래 조용한 사람이야.", "넌 항상 그래, 변하지 않잖아."

인간은 얼마나 자주, 누군가를 이런 말들로 규정해 왔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그런 말들로 고정시켜 왔는가? 이러한 문장들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다. 이것은 반복을 통해 존재를 고정시키는 호명의 언어이며, 동시에 수행된 정체성을 실체처럼 믿게 만드는 구조적 환상이다.


존재는 본래 정지된 실체가 아니다.

존재는 유동적이며,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 흐름이다.

인간의 자아는 완성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의 감정, 관계, 반응을 통해 계속 생성되고 있는 운동적 현상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 유동성에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사회는 존재를 흐르도록 두지 않고, 되어 가도록 두지 않고, “이미 되었다”라고 믿게 만들며 고착시킨다.


그것이 바로 규정의 반복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들은 말들이다.

“착하다.”, “조용하다.”, “산만하다.” , “똑똑하다.” , “문제아다.”


이 말들은 단지 묘사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수행하게끔 유도하는 언어적 주술이며, 그 수행의 반복 속에서 정체성이라는 허상을 고착화시킨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말한다.

“젠더는 본질이 아니라, 반복된 수행이다.”

이 통찰은 젠더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 존재 일반에 적용되는 원리다.


내가 ‘조용한 사람’이 된 것은, 내가 본래 조용해서가 아니라, 조용하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받아왔고, 그 기대에 따라 행동하고 해석하며 살아낸 경험의 반복이 결국 그 조용함을 ‘성격’이라는 이름으로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성(performance)의 구조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에 따라 반복적으로 수행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감각적 허상이다.

그 수행은 사회가 기대한 방향을 따라가며 점점 더 굳어진다. 반복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다움’으로 착각한다.


“나는 내성적이야.” ,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야.” ,

“나는 원래 모험을 싫어해.” , “나는 가족을 돌봐야 해.”


이 문장들은 자유로운 자아의 진술처럼 보이지만, 실은 수십 년간 반복된 규정과 역할 수행의 결과물이다.

이 반복은 정체성을 구성하고, 감정을 설계하며, 행동의 범위를 제한하고, 결국 스스로를 ‘익숙한 나’로 유지하는 감옥을 만든다.


그러나 익숙함은 곧 진실이 아니며, 반복은 정당성이나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나’란 단지 가장 자주 호출되고 반복된 이미지의 잔상일 수 있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품은 존재다. 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정체성을 안정된 패턴으로 고정시키려 한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를 매일 다시 ‘그렇게 행동하도록’ 재교육한다. 나는 매일 나를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기대한 ‘나’를 반복적으로 연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나는 점점 그 연기의 시작을 잊어간다.


“나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다.” 이 말은 기억 상실된 수행의 결과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고착(fixation)이다. 고착된 정체성은 자아의 안전을 제공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빼앗고, 가능성의 흐름을 차단한다.


왜 변화가 두려운가?
왜 새로운 감정 앞에서 혼란을 느끼는가?
왜 다른 방식으로 살고자 할 때마다,
내면에서 “그건 너답지 않아”라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그 목소리는 진정한 내면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된 규정이 남긴 에코이자 잔향이다.
그것은 사회적 수행의 기억이 자기 언어인 듯 되돌아오는 내면화된 통제일 뿐이다.


인간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인간 존재는 매 순간의 감정, 반응, 관계 속에서 다시 구성되고 다시 되살아나는 흐름이다.

나는 오늘의 감정, 오늘의 반응, 오늘의 호흡 속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존재다.

그리고 그 되기(becoming)를 멈추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은 정체성의 박제가 된다.



5장. 정체성은 존재의 집인가 감옥인가?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
감정의 정체를 말로 붙일 수 없을 때,
삶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심리적 불안을 경험한다.

이 불안을 통제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회는 ‘정체성’을 제공한다.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덮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확신으로 대체함으로써 개인에게 안정된 자기 감각을 선사한다.

자기 정의는 불안을 줄이는 심리적 구조물이자, 사회적 수용 가능성을 확보하는 언어적 장치다.


“나는 내향적이야.”,“나는 사람을 잘 못 믿는 성향이야.”,“나는 이런 성격이라 변화는 어려워.”

"나는 남자니까...","나는 여자니까...","나는 의사니까...","나는 교사니까..."


이러한 말들은 일견 자기를 이해하는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존재를 하나의 해석 가능한 틀에 고정시킨다. 그 틀이 반복될수록 인간은 그 안에서 안도하게 되며, 그 안도는 곧 자기 유동성의 포기로 이어진다.


정체성은 종종 보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보호는 움직임의 중단, 즉 변화 가능성의 차단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정체성의 심리 구조는 안심과 고착이다

정체성은 자아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구조다. 그러나 이 구조는 동시에 방어기제로도 작동한다. MBTI, 혈액형, 자가진단 테스트 등은 인간의 복잡성과 변화를 단순한 유형으로 축소한다.

그 결과로 생긴 자기 이해는 편안함을 주지만,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은 제거된다.

“나는 INFP니까 낯선 환경이 불편해.”

“나는 ADHD 경향이 있어서 계획을 못 세워.”

“나는 회피형이라 사랑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이러한 자기 진술은 스스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인 동시에, 자기감정과 행동에 대한 면책적 확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해는 되지만 변화는 어렵게 만드는 해석의 자가 구조다.


정체성은 개인이 자율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승인된 틀 속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사회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정체성의 제공’으로 관리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자기를 봉쇄하게 된다

“나는 이런 삶밖에 감당할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런 삶은 내 것이 아니야.”

이 말들은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축소하고 봉합하는 언어이며, 그 언어는 반복될수록 자기 존재를 안정된 틀 안에 고정시키는 감옥이 된다.


규정의 억압은 부드럽게 작동한다. 정체성이 억압으로 작동할 때, 그 억압은 폭력이 아니라 위로의 형태로 다가온다. 가장 강력한 억압은 억압이 억압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작동한다.


인간은 정체성이라는 이름의 감옥 안에서 안도한다.그 감옥은 벽도 없고, 문도 없다.왜냐하면 그것은 언어 안에 있고, 그 언어는 스스로 반복해 온 자기 해석 속에 이미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때때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질서처럼 작동한다.
그러나 그 질서가 지속적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선언으로만 반복될 때,

그 선언은 감정의 다양성, 관계의 유연성, 자기 존재의 흐름 자체를 침묵시키는 구조로 전환된다.


정체성은 이해가 아니라, 어떤 조건 아래서만 존재를 허용하는 사회적 승인 기제일 수 있다.
이해는 열어주지만, 정체성은 닫는다.






다음은 규정된 존재들 2편:6~에필로그. '역사는 규정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열려왔다 '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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