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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하는 아이와 탁발하는 스님

프롤로그

by Mind Thinker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기대를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심리적 작용이다.

프롤로그


구걸하는 아이와 탁발하는 스님



라오스 북부, 팍벵의 새벽.

메콩강을 따라 흘러내리는 짙은 물안개 속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간밤에 널어둔 빨래가 말랐기를 기대하며 발코니로 나섰다. 그러나 옷자락은 여전히 축축했고, 공기는 놀랍도록 맑고 서늘했다.


이곳은 낮이면 35도를 훌쩍 넘기지만, 새벽녘엔 기온이 뚝 떨어진다. 강가 마을의 고요는 습기와 냉기를 머금고 있었고, 강 건너편의 산등성이에는 구름이 눌러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의 작은 식당에서는 여행자들의 아침 식사가 분주히 준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어느 순간, 두 존재에 멈추었다.


구걸하는 어린아이. 그리고 탁발을 위해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스님들. 그들은 둘 다 무언가를 받기 위해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 둘을 같은 존재로 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유사하다. 손을 내밀고, 침묵 속에 움직이며, 타인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사회는 둘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고 해석한다.

한쪽은 ‘수행자’이고, 다른 한쪽은 ‘걸인’이다. 한쪽은 존경을 받고, 다른 한쪽은 시선을 회피당한다. 무엇이 그들을 갈라놓는가?




스님은 스스로를 수행자라 여긴다. 그가 탁발을 통해 받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공양’이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 시선을 초월하려 한다.


반면, 구걸하는 아이는 스스로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말이 없다. 다만 손을 내민다. 그 행위는 언어 이전의 신호이며,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짓이다.


아이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언어다. 그는 이미 타인의 언어 속에서 설명되고 있고, 타인의 시선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 순간 아이는 '자기 자신'이 되기 이전에, '타인의 규정된 객체'가 된다.


정체성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처럼 작동한다.


이것은 ‘주체의 분열’이며,

‘자아와 타자의 경계 붕괴’, 이고

‘권력에 의한 명명 행위’, 이고 그리고

'이름 붙이기'이다.



라캉은 인간의 자아가 ‘거울 단계’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아이는 거울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전체적인 형상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 거울은 실제로는 부모, 사회, 타인의 시선이다. 그 시선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의도된 구성, 즉 ‘응시(gaze)’다.


푸코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권력은 억압하지 않고, 생산한다”라고 말한다. 즉, 권력은 존재를 감시하고 규율하며, 마침내 새로운 존재 자체를 만들어낸다.


스님이라는 명칭, 수행자라는 존엄성은 일종의 사회적 코드다. 반대로 ‘걸인’이라는 호명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존재적 감옥이다.



존재의 집.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해석한다. 그러나 그 언어가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그 순간 존재는 ‘자기’로 말하지 못한다. 그는 '명명된 존재’, 즉 대상화된 자아로 살아가게 된다.


구걸하는 아이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손을 내밀 뿐이다. 그 손은 말을 할 줄 모르는 자의 신호이며, 침묵은 종종 고요가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이다. 그리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는 정의되지 못한 존재, 혹은 규정당한 객체다.


아이는 자아 정체감을 형성하기 이전에 ‘내사(introjection)’의 과정을 거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기대를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심리적 작용이다.


‘너는 가난해, 너는 무가치해, 너는 도움이 필요해’라는

타인의 말은 결국 아이의 자아 형성을 구조화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갖기 전에, 사회가 준 이름에 갇힌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의 고착’이다.


이 고착은 생존을 위한 방어였지만, 동시에 성장의 적이다.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을 내미는 것뿐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나는 누구다’라고 말한다. 나는 직장인이다. 나는 어머니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국회의원이다. 나는 사업가다. 나는 부자다. 나는 과학자다. 나는 철학자다. 나는 목사다. 나는 가난한 자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나는, 나는,....


하지만 그 말은 정말 ‘내가 선택한 언어’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에게 부여하고, 반복되며 내면화된 정체성인가?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끊임없이 말한다.‘너는 이것이다.’

그것은 언어적 질서의 폭력이며, 존재의 가능성을 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수많은 정체성의 옷을 입고 살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도 되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


다시, 그날 새벽. 강가를 걷던 아이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팍벵의 새벽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물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존재는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다음은 규정된 존재들 2편. '규정은 언어다-말의 구조적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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