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된 존재들 1편. 1~2장
나는 그 아이를 불쌍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스님에게는 고요한 존엄을 보았다.
하지만, 그 틈에 의문이 스몄다.
그 감정은 누가 쓴 언어인가?
나는 정말 내 안에서 우러난 연민과 존경의 감각을 느낀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내게 가르쳐준 감정의 해석 방법을 따라 반응한 것인가?
그 아이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때때로 말하지 않는 것보다 더 강력한 침묵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인간은 언어를 갖지 못하면 해석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를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언제나 누군가가 우리를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너는 학생이다.”, “당신은 엄마다.”, “그는 실패자다.”, "그는 부자야"
"그는 사장이야", "그는 국회의원이야", "그는 회사원이야"
그러한 언어들은 설명이 아니라, 존재의 위치를 할당하는 권력의 언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나 그 말의 뒤편에는 냉정한 반문이 숨어 있다.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한 존재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언어는 존재를 설명해주는 따뜻한 집이 아니라,
존재를 담을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르는 구조물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로 간주되고,
침묵은 고요가 아니라 소거가 된다.
구걸하는 아이는 그 구조 바깥에 있었다.
그는 언어가 없었다.
아니, 사회가 인정하는 존재의 문법을 가지지 못했다.
그의 침묵은 해석되지 않았고,그의 손짓은 말로 바뀌지 못했다.
그는 그저 ‘불쌍한 아이’라는 규정된 감정의 프레임 안에 던져졌다.
반면, 스님은 침묵했지만 해석되었다.
그의 침묵은 수행자의 침묵, 철학자의 침묵, 존엄의 상징으로 읽혔다.
왜인가?
그에게는 사회가 이미 부여한 언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탁발’이라는 단어로, ‘수행자’라는 정체성으로,
그의 침묵조차도 설명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차이는 단지 사회적 지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이 해석될 수 있는 언어를 부여받았는가의 차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든 존재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왜냐하면 사회는 모든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입을 여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승인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조에 편입되었다는 뜻이다.
그 구조 안에서만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므로 규정은 단지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고, 분류이며, 승인된 감정과 판단의 체계다.
인간은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을 때 안심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경험을 했어.”, “나는 실패했지만, 지금은 괜찮아.”
그 모든 말은, 사회가 허락한 언어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틀 밖의 존재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언어 바깥에 머무는 자, 말로 지칭되지 않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오히려 진짜 존재의 형태로 남겨진 자들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말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사회가 나에게 허용한 단어의 조합일 뿐일수도 있다.
인간은 언어 이전에도 있었고, 언어 없이도 살아간다.
하지만 언어는 그 인간을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사회가 말하는 인간만을 존재로 만든다.
이제 그 언어의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그 구조 안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나’와 ‘배제되었던 나’를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규정의 언어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규정의 폭력안에 안주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름을 부여받는다.
반면 어떤 존재는 죽고 나서도 끝내 이름을 얻지 못한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불리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그 존재를 어떤 자격과 지위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결정하는 인식의 시작점이며, 동시에 배제와 분리의 출발선이다. 이름은 곧 구분이자 통제이고, 이해라기보다는 질서화의 장치다.
모든 사람은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사회 안에서 ‘해석 가능한 이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름이 제도와 규범에 의해 승인되고, 인정되고, 배치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는 예술가야.” , “그 사람, 무직이래.” , “그는 우울증 환자야.” , “요즘 백수래.”
“쟤는 유학생이래.” , “그 사람, 돌싱이래.”, “3수 끝에 붙었대.”, “여자가 무슨 군대식 체질이야?”
“혼자 살면서 무슨 애완동물을 셋이나 키운대.”
이 문장들은 단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들은 존재를 특정한 틀에 고정시키는 호명의 행위이며, 존재를 사회적 질서 속의 좌표로 등록하는 지시적 언어 행위다. 말은 설명이 아니라 배치이고, 호명은 부름이 아니라 규정이고 제한이다.
푸코는 언급한다. “권력은 억압하지 않는다. 권력은 생산한다.”
억압은 어떤 것을 금지하거나 강제로 막는 방식이라면, 생산은 더 정교하다.
사회는 인간을 향해 , “너는 이런 인간이야”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인간을 해석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내며, 그로 인해 인간은 기능화되고, 승인되고, 동시에 제어된다.
‘장애인’이라는 명칭은 보호와 배려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정상성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좌표화하는 명명이 된다. ‘여성 CEO’, ‘비혼모’, ‘조현병 환자’, ‘다문화 가정’ 같은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이 이름들은 중립적인 설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안에는 늘 기준점으로서의 ‘보통’, ‘정상’, ‘기준적인 것’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그 말을 쓰는 순간, 해당 존재가 지금 여기 사회의 규범적 질서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를 동시에 가늠하게 된다.
“그 사람은 여자지만 리더십 있어.”
“그 친구는 무직이지만 꽤 괜찮은 사람이야.”
“혼자 아이를 키우지만 잘 살고 있더라고.”
이 문장들 속에는 항상 ‘예외’와 ‘기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명명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일상 생활에서도 권력은 여전히 은밀한 방식으로 말을 통해 작동한다.다음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이지만, 규정의 작동이 내포된 말들이다
“능력 있는 여성이라 결혼 못 했대.”
--능력과 결혼 여부 사이의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는 규정이다.
“요즘 애들은 MZ세대라서 그래.”
-- 세대 전체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해석 가능한 집단으로 환원한다.
“그 사람 공무원이래. 안정적인 삶을 택했대.”
-- 삶의 양식마저 직업 명칭으로 단정한다.
“비혼 선언한 친구야.”
-- ‘비혼’이 개인의 삶의 흐름이 아니라 정체성 항목처럼 취급된다.
“저 커플은 동거 중이래.”
-- 동거라는 말 하나로 사회적, 윤리적 거리감을 생성한다.
“그 사람은 비정규직이야.”
--고용 구조가 곧 인간의 질서이자 가치 평가 기준이 되어버린다.
“사상 초유의 9급 합격생, 고졸 출신이라 화제.”
-- ‘고졸’이라는 단어가 이례성과 대비 구조 안에서 호명된다.
또한 우리는 특정 단어들을 의심 없이 쓰며, 그 안에 권력의 방향과 질서가 이미 들어 있음을 잊는다
시댁: ‘시(媤)’는 남편 쪽을 뜻하지만, ‘댁(宅)’이라는 존칭은 시가에만 붙는다. 반면 ‘처가’에는 그런 존칭이 없다. -- 가부장 질서에 따라 남성 중심 가족 구조가 명명된 흔적이다.
도련님 / 아가씨: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남동생을 ‘도련님’이라 부르고, 그 가족을 ‘아가씨’, ‘작은어머님’이라 부르는 구조다. --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타인의 집안에 편입되며, 이름 대신 관계 속 호칭으로 살아간다.
미스 / 유부녀 / 처녀 /총각/ 아줌마 / 아저씨 : 정체성이 개인이 아니라 결혼 여부에 따라 이름 지어진다.
-- “결혼했냐?”는 질문이 곧 정체성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호주(戶主): 법적 명의와 가족의 대표는 오랫동안 오직 남성에게만 할당되었다.
-- 존재의 법적 명명 권한이 불균형하게 주어진 역사다.
이것이 바로 명명(naming)의 본질이다. 명명은 단지 부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디에 배치하고,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획 행위다.
“이 사람은 ○○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존재는 더 이상 ‘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이름 지어진 자’, 규정된 형태로 존재를 허락받은 자가 된다.
이 권력은 언제나 수직적으로 작동한다. 내가 나를 설명하기도 전에, 사회는 이미 나를 특정한 언어로 호출하고 있다.그리고 그 호출은 반복되고 내면화되어, 나는 어느새 타인의 언어로 나를 설명하게 된다.
“왜 나는 늘 내 직업부터 말하게 되는가?”
“왜 나는 내 가족 형태, 병력, 나이를 자꾸 해명하듯 말하게 되는가?”
이 물음들은 곧, 우리가 이미 해석 가능한 언어의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증거다.
가장 교묘한 억압은 그 억압이 도움과 배려처럼 느껴질 때 작동한다.
진단명은 고통을 이해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특정한 언어로 고정시키고, 그 사람을 ‘고통을 가진 존재’로만 이해하게 만든다.
‘우울증 환자’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된다.
‘발달장애’, ‘경계성’, ‘트라우마 이력’
이 모든 말은 이해인 동시에 축소다.
정체성은 그렇게 생산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실은 “나는 이렇게 분류되었어”라는 사회적 기획의 산물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 기획에 스스로를 적응시킨다. 왜냐하면 그 분류가 더 안전하고, 더 예측 가능하고, 더 설명하기 쉬운 언어의 집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정은 결국
자기 감각의 포기,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감금,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권리의 상실로 이어진다.
이것은 단지 말하기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존재를 누가 만들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름은 자율이 아니다.
이름짓기는 권력의 규정이다.
다음은 규정된 존재들 2-3. '규정은 시스템이다'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