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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옥

규정된 존재들 1편: 6~7장

by Mind Thinker

시간의 감옥



6장. 기억의 감옥

“나는 그런 사람이야. 왜냐하면,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거든.”

“나는 어릴 적 부모의 이혼을 겪었어. 그래서 지금도 사람을 믿기 힘들어.”
“나는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어. 그래서 지금의 외로움이 익숙하고 당연해.”
“나는 젊었을 때 실패를 많이 했거든. 그래서 지금은 안정만을 추구해.”

이 말들은 마치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한 사람의 진술처럼 들린다. 마치 고통을 곱씹은 끝에 삶을 통찰하게 된 듯한 태도다. 그러나 이 설명은 과연 지금의 나를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그 과거의 언어에 나를 다시 가두는 ‘정당한 감옥’을 만들어주는가?


기억은 사건이 아니다. 기억은 언어로 다시 쓰인 해석이고, 그 해석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문이 아니라, 반복되는 이야기의 틀이 될 수 있다. 마치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놓고, 그 속에 갇힌 표정을 ‘지금의 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현재의 감정을 느끼는 대신, 그 사진 속 감정의 유령을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사건이 만든 결과물이 아니다.

그 사건을 어떻게 말해왔고, 그 말이 어떻게 반복되었는가가 지금의 나를 만든다. 그리고 그 말이 익숙해질수록, 그 언어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묶인다.


기억은 과거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 감정, 언어, 그리고 사회적 맥락이 중첩된 해석의 구조물이다. 신경과학자들은 기억을 ‘뉴런 간 연결의 강화(synaptic potentiation)’로 설명하지만, 그 연결이 어떤 방식으로 강화되었는지는 뇌의 감정중추(특히 편도체)와 해석체계(전전두엽)의 작용에 크게 의존한다. 즉, 기억은 사실의 저장이 아니라 해석된 감정의 기록이며, 다시 불러올 때마다 수정되고 재조합된다.


“나는 어릴 때 무시당했어”라는 말은 단지 한 번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부여된 감정, 사회적 반응, 자기 해석이 반복적으로 정착된 결과다. 이 말은 자기 보호의 언어이자, 동시에 현재의 자아를 고정하는 프레임이다. 인간은 그 해석을 ‘사실’처럼 말하면서, 스스로를 과거의 렌즈로 현재에 고정시킨다.



반복된 기억은 ‘실체’가 된다

기억은 반복될수록 실제보다 더 강력한 구조가 된다.
스스로가 말한 대로, 느낀 대로, 설명한 대로 기억은 되풀이된 해석의 언어로 자기 정체성을 생산한다. 이를 ‘자기 정체성 서사(self-narrative identity)’라고 부른다. 사람은 자신을 ‘이야기’로 구성하고, 그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이야기 속의 나’로 살아간다.

“나는 실패한 경험이 많아, 도전을 두려워해.” , “나는 상처가 많아, 관계가 두려워.” , “나는 항상 그렇게 돼, 어쩔 수 없어.”

이 말들은 자기 보호의 수단처럼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그 문장은 나의 실체처럼 굳어진다. 이는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구조다. 내가 그렇게 믿을수록, 나는 실제로 그 감정과 행동을 되풀이하고, 나라는 존재는 그 틀 안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현재의 선택, 감정, 관계의 폭을 축소시키는 해석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이 순간을 가두는 기억

기억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해석하는 언어적 장치다. 뇌는 새로운 감각을 받을 때마다 과거의 경험과 연결해 해석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예측 기능(predictive coding)’이다. 그러나 이 기능은 방어적 메커니즘으로도 작동해, 새로운 감정이나 관계를 낯선 위험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나는 과거에 상처를 받아서 지금 이래.” ,“나는 원래 이런 성격이야, 그렇게 자랐거든.”

이것은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현재를 과거의 언어로 통제하려는 심리적 전략이다. 그렇게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고정시키는 기획적 장치가 된다.


과거는 배경이지,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 기억은 정체성의 기반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본질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과거를 설명으로 사용하지만, 그 설명은 오히려 현재를 결정론적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나는 과거가 이랬으니, 지금은 이렇게 살아도 된다.” , “나는 그런 경험이 있으니, 이런 감정은 당연하다.”

이러한 해석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느끼고 살아갈 가능성을 제거한다. 이는 ‘트라우마의 재연(reenactment)’과 유사하다. 과거의 구조가 현재에 침투해, 새로운 감정과 선택을 낡은 틀로 봉합해 버리는 것이다.


기억은 결코 지워야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나의 이름이 되어선 안 된다.

과거는 배경이고,

현재는 감각이며,

존재는 흐름이다.

정체성이란 ‘설명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감정, 관계, 선택 속에서 계속 쓰이고 있는 미완의 이야기다. 나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존재다.



7장. 규정은 두려움이다

인간은 흐르는 존재다.

그러나 흐른다는 것은 불안을 동반한다.

형체를 갖지 않은 물처럼, 방향 없이 흘러가는 시간처럼,

규정되지 않은 상태는 인간에게 혼란과 위협을 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없을 때,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설명할 수 없을 때,
다가올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가늠할 수 없을 때,
현대인은 마치 땅 없이 허공에 발을 딛는 듯한 심리적 공백에 휘말린다.


그 공백은 단지 ‘정보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해석되지 않은 상태’, 즉 이름 붙이지 않은 상태다.
그리고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통제할 수 없고, 소속되지 않았으며, 예측 불가능하다.


이 불안은 본능적으로 메워야 한다. 인간은 그 공백을 ‘정체성’이라는 말로 채운다. 자기 자신에게 태그를 달고, 행동에 이름을 붙이고, 감정에 이유를 덧씌우는 것이다.

“이건 원래 내 성격이야.” “내가 불안한 건 예전 일이 있어서 그래.”

이것은 스스로를 설명하는 언어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흘러가지 않도록 붙잡기 위한 '언어의 닻(anchor)'이다. 사람들은 그 닻을 통해 현재를 고정시키고, 변화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한다. 그러나 그 닻은 방향이 아니라 정지의 상징이다. 그것은 나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자기 정의는 두려움의 중화 장치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려 한다.
“나는 이런 경향이 있어.”, “나는 이 이상은 무리야.” 와 같은 말은 언뜻 자기 이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불확실성 앞에서의 방어적 구문이다. 이는 ‘인지적 폐쇄성(cognitive closure)’의 한 형태다. 즉,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의미가 완전히 부여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의의 해석을 덧씌우며 불안을 봉합한다.


‘자기 정의(self-definition)’는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 정의는 자기 이해가 아니라, 심리적 생존을 위한 안정화 기제다. 자신을 정의하는 순간, 인간은 불안정한 현재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일관된 자아의 감각을 얻는다.
그러나 그 감각은 진실이라기보다, 혼란을 견디기 위한 일시적 확신의 구조물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유는 필연적으로 유동성, 변화, 예측 불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유동성은 사회적으로 불편하고, 심리적으로는 위협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내면화한다.

'질서가 주는 안심'과 '예측 가능한 자기'

이 구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보다는 안정된 정체성을 선택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회는 이 두려움에 의한 선택을 제도화한다.

‘가족’, ‘학교’, ‘국가’, ‘종교’, ‘회사’...
이 모든 제도는 불확실성의 집단적 공포를 통제하기 위한 질서의 장치들이다. 이 제도들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 “이 기준 안에서 너는 안전하다.” , “너의 역할은 이 범주 안에 있다.”

개인은 이 구조 속에서 안주한다. 스스로 규정되기를 요구한다. 아니 애원한다.


뇌는 새로운 환경보다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더 적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신경과학적으로 이는 ‘에너지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least effort)’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뇌의 인지 부하를 줄이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해석틀에 현실을 맞춘다. 그리고 인간은 그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그런 삶은 못 살아.”, “나는 원래 그런 성격이야.”
라는 문장을 계속 반복하면서 ‘그럴듯한 나’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 나가 거짓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의가 너무 자주 반복되어 그 이외의 나를 시도해 볼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자기 해석은 실제로는 가능성의 회피이자, 두려움의 위장된 표현이다.


새로운 감정, 새로운 관계, 새로운 정체성 앞에서
인간은 위험을 감지하고 오히려 익숙한 감옥을 선택한다.

이 감옥은 물리적이지 않다.
이 감옥은 언어로 된 자기 확신, 즉 자주 반복한 자기 서사로 구성된다.


‘자기 변화’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질서 전체에 대한 질문이 된다. 정체성을 바꾸는 행위, 예컨대 성별 전환, 가족 해체, 종교나 이념의 전환, 안정된 직업의 이탈은 단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 체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삶의 틀은 언제든 다시 설계될 수 있다.”

이 선언은 단지 파격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가 자신의 틀을 의심하게 만드는 실존적 전염성을 갖는다.


그래서 사회는 이들을 불안해한다. 단지 낯설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사회가 믿어온 규범의 절대성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이해 가능한 존재들이다.
정해진 이름, 고정된 역할, 예측 가능한 행동은 관리 가능하고, 통제할 수 있고, 통계적으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체성을 바꾼 자에게 사회는 다음과 같은 언어를 덧씌운다

“그건 병이야.”,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야.”, “그건 극단적인 예외일 뿐이야.”, “그런 선택은 위험해.”

이 언어들은 단지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해석 불가능한 존재’를 기존 해석 체계 안에 다시 배치하려는 통제 장치다.

철학자 푸코는 이런 구조를 ‘정상성의 폭력’이라 불렀다.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는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병리화하고 주변화한다. 그 병리화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는,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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