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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의 뇌

규정된 존재들 2편 1장

by Mind Thinker


1장. 사유의 기원 , 파충류의 뇌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을 '나'라고 불렀을까?


현대인들은 의심 없이 이 질문을 생략한 채,
인간은 당연히 자기를 알고, 말할 수 있으며,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였다고 가정해 버린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의 시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시점은
지극히 짧고,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을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 이전의 삶에서
인간은 ‘자기라는 자각이 없던 존재’였다.



호모 사피엔스 이전의 인간형,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들은

도구를 만들고, 불을 다루고, 사냥을 했지만,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생존했다. 그러나 존재를 해석하지 않았다.

살았지만, 살고 있다는 사유는 없었다.


그 삶은 순간과 반응의 연속이었다.

공포에 움츠러들고, 기쁨에 눈을 반짝이며, 배고픔에 음식을 찾고, 상실에 멍하니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들은 아직 ‘이름’을 갖지 않았고, 그 감각들은 아직 ‘자기’라는 중심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감각의 흐름 속에 사는 존재였다.

말하자면,
규정 이전의 존재, ‘무명(無名)’의 존재였다.



약 7만 년 전, 인간은 이른바 ‘인지 혁명(cognitive revolution)’을 겪으며 기존의 인간 종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갖게 된 독특한 정신적 능력, 즉 실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의 출현을 뜻한다.


이 시기의 인간은 실제 경험 외의 것들, ‘신화, 규칙, 규범, 숫자, 미래의 사건 등’에 대해 사유하고 공유하는 언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상적 사유(mental simulation)’의 능력은 도구적 사고에서 나아가 사회적 협력, 서사적 기억, 상징의 체계화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결정적인 의문 하나가 남는다.

“인간은 언제부터 자기 자신을 인식했는가?”

즉, ‘타자’를 지칭하는 언어는 언제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언어 체계의 발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기인식(self-awareness)은 메타인지(metacognition) 즉, '자기 자신의 상태를 반성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의 발달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나는 지금 두렵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감정에 단순히 몰입된 상태(immersive state)가 아니라, 감정과 자기 사이에 ‘심리적 거리(psychological distance)’를 두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감정을 경험하는 주체이자 동시에 그 감정을 인식하고 분석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화가 나 있다, 나는 지금 두렵다.' 이러한 말이 가능하려면 나와 감정 사이에 ‘의식적 틈’이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의식적 거리(conscious distance)’가 형성되기 이전의 인간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자기’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틈이 생기기 전까지,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살아냈을 뿐,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인간은 ‘파충류의 뇌’, 즉 뇌간(brainstem)과 변연계(limbic system)에 의존한 본능적 반응 기반의 생존 체계였다.

이 뇌 구조는 도망치고, 움츠리고, 공격하고, 삼키는 단순하지만 즉각적인 생존 반응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 뇌의 특징은 ‘현재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간 개념도, 미래 예측도, 자기 성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감각에 즉각 반응하는 완전한 동시적 존재, 1분의 1의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살아냈다.
규정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저 순간의 감각에 반응하며 존재했다.



‘나’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아닌 것’과의 분리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의식은 세계와의 동일함이 아니라, 세계와의 단절에서 발생한다. 이 단절은 우연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의 축적, 언어의 분화, 그리고 타자와의 비교 가능성이라는 복합적인 인식 조건들이 일정 임계점에 도달할 때 비로소 성립된다.


과거의 감각을 현재의 감각과 대조하고, 타인의 행동을 나의 감정과 비교하며, 이름 붙인 사물과 그렇지 않은 사물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될 때, 인간은 처음으로 ‘자기’를 전체 흐름에서 분리된 단위로 지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인식(self-recognition)의 최초의 조건이다. 존재의 흐름 속에 자신이 자연과 혼연일체였던 상태에서, 처음으로 ‘나’를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떼어내는 의식이 출현한 것이다.


이 순간, 인간은 단순히 느끼는 자에서 ‘느낀다’고 말하는 자, 그리고 마침내 그 느낌을 규정하는 자로 변화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단순한 진보가 아니었다. 존재를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인간 존재는 언어에 포획되기 시작했다.


표현 가능한 것만이 ‘실재’로 간주되고, 말로 옮길 수 없는 감각은 사유의 외곽으로 추방되었다. 존재를 설명하는 능력을 갖춘 인간은 동시에 그 존재를 붙잡고, 분석하고, 고정시키는 힘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자유로운 흐름이었던 삶은 ‘무엇인가로 규정되어야만 하는 삶’으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언어의 기원이자,
언어가 만든 첫 번째 감옥이었다.



토마스 네이글은 '박쥐가 된다는 것(What Is It Like to Be a Bat?)'이라는 문제적 에세이에서 인간 중심의 의식 이해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박쥐가 무엇을 느끼는지 정말 알 수 있는가?”

박쥐는 초음파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환경을 감지한다. 그 경험은 인간 언어로 완벽히 환원될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며, 타자의 입장에서 완전히 재현될 수 없다.”


이 질문은 단지 박쥐의 감각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인간 자신에게 향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인간이, “나는 지금 슬프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진정 나의 감정 전체를 포착하는가?

혹은 단지 복잡한 감각 흐름의 일부를 언어로 포장한 것에 불과한가?

‘나’라는 존재는 정말 언어로 전부 설명 가능한가?

아니면 언어 이전의 감각적 흐름, 정의되지 않은 내면의 상태, 그곳에서만 진짜 '나'는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답한다.

“시간은 시계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흐르는 질적인 경험이다.”

그가 말한 ‘순수지속(durée)’은 물리적 시간과는 다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고 끊김 없이 흐르는 의식의 내면적 시간이다.

그 지속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라는 단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규정되지 않은 존재였고

그저 감각과 흐름으로만 이루어진 자들이었다.



현대인들은 당연하게 인간은 ‘말하는 자’, ‘정체성 있는 자’였다고 가정해 왔다.
그러나 그 가정 이전에,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규정되지 않은 채, 이름 없이, 말없이, 그저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 존재는 말하지 않았지만, 충만하게 살아 있었다.
그는 정체성이 없었기에,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 있었다.


그리고 오늘, 팍벵의 새벽,
그 아이의 손짓에서 내가 보았던 침묵의 몸짓은
어쩌면 그 존재의 기억을 인간의 내면에서 다시 깨우는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지입니다. 개인사정으로 한 회(금요일) 쉬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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