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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셋째딸 Jan 21. 2021

0부터 9의 세계

아픈 채로 할 일 하기

병원에 통증 때문에 왔다고 하면 간호사가 종이를 한 장 준다. 통증 정도를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표시하는 막대표가 그려진 종이다. 0에는 웃는 그림, 10에는 울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간호사는 7이 아기를 낳는 정도의 통증이라며, ‘뭔지 아시겠죠?’라는 눈빛을 보낸다. 아기를 낳아본 적은 없으나 하늘이 노래질 정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하늘이 노래질 정도라면 필시 엄청난 고통일 게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지 몸으로 체험한 고통은 아니었다. 섬유근막통 진단을 받았던 시기에 나는 늘 7보다는 높은 숫자에 동그라미를 표시하고는 했다. 아기를 낳아본 적도 없으면서 나의 고통은 산통보다 심할 거라 여겼던 것이다. 하늘이 노래질 정도라고 한들, 내가 직접 겪는 아픔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의 통증 수치는 늘 8이나 9였다.


그러면서도 나의 눈길은 언제나 0에 머물러 있었다. 통증이 전혀 없는 0의 세계. 너무나 그리운 그 세계로 반드시 돌아가리라 다짐하며 1부터 7의 세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1, 2, 3, 4, 5, 6, 7. 그리고 그 사이에 숨겨진 수많은 소수점들의 세계를 싹 무시한 채, 나의 머릿속엔 오로지 0과 9의 세계만이 존재했다. 


0과 9 사이에 얼마나 많은 숫자가 펼쳐져 있는지 깨닫기까지 약 2년이 걸렸다. 0이 아니어도 괜찮다, 9에서 0.00001만 좋아져도 감사하다, 어제보다 나빠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제로 0.00001씩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나의 통증 수치는 9도 아니고, 7도 아니라 6의 어디쯤인 것 같았다. 씻은 듯이 낫겠다는 욕심을 버리자 오히려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아가 그간 미뤄왔던 일들을 해보기로 했다. 참는 데는 이제 이력이 났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9밖에 더하겠는가. 9로 간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면 되었다. 한번 해봤으니까 어렵지 않을 터였다.


0에서 10까지의 막대표는 기찻길이고 나는 9 번역에서 탑승한 승객이었다. 기차의 이름은 ‘좋아지는 기차’다. 세월아 네월아 제멋대로이긴 해도, 최소한 역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런 ‘좋아지는 기차’에 올라탔다고 상상했다.


그 기차에 올라탄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미술 교실 등록이었다. 아프면 아픈 채로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마음이었는데 그 시작이 그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휴지, 교과서 여백, 공책 등 주변에 종이만 있으면 그림을 그리곤 했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돈이 많이 들 거라는 말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갔다.


미술 교실에서 일주일에 두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비평은 없고 칭찬만 오가는 곳이었다. 학생 대다수가 중년 여성인 곳에서 한 분이 두드러졌다. 85세 할아버지셨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 화가 뺨치게 잘 그리시는 분이었다. 하루는 그분이 내 그림을 보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동안 얼마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을까? 얼마나 배우고 싶었을까?”


그때의 뭉클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통째로 다 이해받은 기분? 할아버지가 나의 인생 전체를 순식간에 들여다보고 ‘아, 뭔지 알겠어.’라고 말한 것 같은 기분. 어설프지만 열심히 붓질한 그림에서 나의 결핍과 소망을 읽어준 할아버지가 고마웠다.


신기하게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지 않은 순간들을 잘 관찰해 보니 샤워할 때, 그림 그릴 때만큼은 괜찮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영 교실을 추가해보았다. 수영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더 아파질까 무서워서 차마 시도하지 못했던 운동이다. 신경과 의사 두 명이나 수영처럼 호흡이 너무 거칠어지는 운동은 하지 말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아파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속에서는 두통을 잊을 수 있었다. 샤워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하루 중 유일하게 통증이 0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통증 수치 4는 운동을 할 수 없을 정도를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4 아래로 내려온 셈이다. 당당히 수영인의 대열에 합류한 내가 4일 리가 없지 않나.


의사는 말했다. 당신처럼 갑자기 두통이 시작된 경우는 깨끗이 낫기란 힘들다고. 예전 같으면 이 말에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괜찮았다. 깨끗이 낫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면 언젠가는 좋아지는 날도 오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픔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며, 나의 병을 고치는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드디어 길고 긴 병원 쇼핑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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