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간다고

알코바사, Alcobaça

by 나예

중부 지역을 돌아보기 위해 차를 빌렸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수도원들을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알코바사(Alcobaça)의 산타 마리아 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 바탈랴(Batalha)의 산타 마리아 다 비토리아 수도원(Mosteiro de Santa Maria da Vitória), 투마르(Tomar)의 크리스투 수도원(Convento de Cristo)을 돌아볼 생각이다. 물론 하루에 다 돌아볼 순 없으니까 적당히 며칠에 걸쳐서 찬찬히 이동하기로 했다.


잠시 머물렀던 리스본의 숙소에서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하고 예약한 차를 받으러 갔다. 분명 작은 차를 예약했는데 엄청나게 큰 차가 불을 깜빡이며 기다리고 있다. 업그레이드에 업그레이드에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그런거라며 ‘좋지?’ 하고 렌트카 업체 직원이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큰 차가 썩 달갑진 않다. 이런 대형차는 한국에서도 몰아본 적이 없는데.. 가뜩이나 골목이 많은 유럽에서 이렇게 큰 차를 컨트롤할 수 있을까 싶어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평일, 게다가 겨울. 좁은 길도 넓은 길도 거의 항상 차가 없어 걱정했던 것보단 수월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알코바사의 산타 마리아 수도원.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장식적인 요소가 별로 없다. 이 수도원은 아폰수 엔리케가 산타렝 전투에서 무어인에게 승리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으며 이후엔 시토 수도회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수도회의 건축물답게 검소하고 깔끔한 것이 전부인 곳이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처음으로 지어진 고딕 건축물’이라는 명성답지 않게 조금은 썰렁하고 또 밋밋했다.

그나마 바깥엔 장식이 조금 있는 편이다


사실 산타 마리아 수도원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수도원 자체가 아니라 포르투갈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페드루 왕과 이네스의 석관이다. 페드루 왕은 왕자이던 시절에 카스티야의 콘스탄사 공주와 정략 결혼을 했는데 그녀의 시녀였던 이네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콘스탄사 공주가 죽고 난 후, 이네스와 재혼하려하였으나 신분 차이 등으로 인해 이마저도 할 수 없었다고. 이후 둘은 리스본을 떠나 살며 자식을 넷이나 낳았는데 이네스가 본인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왕세자를 암살하려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소문으로 인해 끝내 페드루의 아버지(아폰수 4세)의 명령으로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페드루가 왕위에 오른 뒤, 이네스의 처형에 직접 가담한 신하들을 찾아내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보라’며 산 채로 심장을 꺼냈으며, 자신의 것과 똑같은 석관을 만들어 그녀의 시신을 다시 수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죽은 자가 모두 깨어난다는 심판의 날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보고싶다는 그의 바람 때문에 지금도 둘의 석관은 마주보게 놓여있다.


차마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는, 여러모로 비극적이면서도 끔찍한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모른 채 눈에 보이는 대로만 감상한다고 해도 두 석관엔 바르톨로메오의 일생과 그리스도의 고난, 인생의 수레바퀴, 수태고지와 최후의 심판 등이 섬세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있어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칼로 도려내기라도 한 듯 일부 부서진 부분도 있는데 나폴레옹의 군대가 보물을 찾겠답시고 파손한 흔적이라고 한다. 불한당 같은 녀석들! 석관 자체가 진기한 보물인데.. 물론 그런 보물이 아니라 '먹고사니즘'에 입각한 진짜 보물을 찾기 위한 시도였겠지만 온전한 형태였으면 더 좋았을걸 싶어 아쉽기도 했다.


수도원엔 많은 수도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주방의 역할 또한 중요했다고 한다. 주방엔 엄청나게 커다란 굴뚝이 있다. 역시나 예쁘게 꾸몄다는 느낌은 전혀 없고 그저 검소하고 실용적으로 만드는데에만 초점을 둔 것 같다. 식당과 기숙사를 연결하는 통로엔 좁은 문이 하나 있는데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살이 찐 수도사는 탐욕을 절제하지 못한 죄로 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굶겼다고도 한다.


회랑의 레몬나무엔 레몬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노란 레몬을 타고 빗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다는 점만 빼면 고요하고 평화롭다. 연인의 복수를 위해 산 채로 남의 심장을 뽑아내었다는 잔인한 얘기도, 뚱뚱한 것은 죄악이므로 무작정 굶겼다는 가혹한 얘기도 이젠 모두 지나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이야기도 언젠가는 지나간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 또한 지나간다고 말들은 많이 하지만 정말로 지나가는 동안에는 다들 어찌 견디는지.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나는 동안에는 정말로 죽을 것 같은데, 시간이 멈춘 것만 같고 그 자리에서 콱 쓰러져 죽어버릴 것 같은데 다들 어찌 견디는지. 그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스스로 깨치지도 못했다. 우린 아직도 방법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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