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의 미학

바탈랴, Batalha

by 나예

알코바사를 떠나 바탈랴에 닿았다. 알코바사와 비슷하게 바탈랴에도 역시 수도원뿐이다. 잘 지은 수도원 하나가 이 동네 주민들을 모두 먹여살리고 있다.


산타 마리아 다 비토리아 수도원은 주앙 1세가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며 성모 마리아께 감사하기 위해 지은 수도원이다. 알주바호타 전투가 끝나고 일년 뒤 첫 삽을 떴다는데,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완성을 시키지 못했고 지금도 미완성인 상태. 물론 지금은 짓고 있지 않으니까 미완성인 부분은 앞으로도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다.


산타 마리아 다 비토리아 수도원은 수수했던 알코바사의 수도원과는 정반대로 볼거리가 무척 많았는데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왕들을 거치며 계속 뭔가가 덧입혀 지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한 건축물에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쪽에서 수도원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달라지는 점도 독특했다. 이쪽에선 이런 얼굴을, 저쪽에선 저런 얼굴을 보여주는, 여러모로 매력넘치는 수도원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홀딱 반했다.

정문에는 12사도와 성인, 천사 등이 세밀하게 새겨져있다


이쪽에도 왕가의 석관들이 있는데 알코바사의 석관들과는 다른 스타일이긴 하지만 역시 제법 화려하다. 하지만 이쪽은 석관 자체가 화려하다기보다는 놓여있는 공간이 화려하다는게 좀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꼬임 기둥은 돌을 깎았다기보단 찰흙을 돌돌 말아 빚은 꽈배기를, 회랑의 장식은 살포시 걸쳐 놓은 손뜨개 레이스를 닮았다. 이리저리 꼼꼼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용맹스럽고 웅장한 느낌을 잃지 않는 건축물이다. 발을 떼어 새로운 공간을 만나는 내내 감탄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바탈랴 수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미완성 예배당이었다. 정말로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로도 unfinished chapel이라고 안내되어있다. 두아르트 1세가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결국 완성시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완성되지 못한 공간이 완성된 다른 공간보다 훨씬 멋지다는 건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얘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곳은 인간이 손으로 부릴 수 있는 모든 재주를 동원해 지은 것만 같다. 엄청나게 세밀하고 정교해서 감탄을 넘어서 한숨이 나올 정도다. 조각칼로 지우개를 깎는 것도 내 맘처럼 쉽지 않은데, 대리석으로 이렇게 정교한 무늬를 조각하다니, 얼마나 석공들을 쥐어짰을까!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어쩌면 조금 더 멋지게, 조금 더 정교하게, 조금 더 높게! 를 외치다가 끝내 완성을 시키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만약에 이 공간이 완성된 상태였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훨씬 더 멋졌을까? 얼마나 높이 지으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쉽게 가늠할 순 없을터. 하지만 완성된 모습이 더 멋있을 순 있어도 천장이 없는 지금의 모습보다 더 인상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미완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유의 울림은 꽤나 매력적이다. 미완성의 미학이랄까.


예배당 한 켠에는 두아르트 1세와 그의 왕비가 비에 푹 젖은 채 잠들어있다. 천장이 없으니 별 수가 없다. 우리도 내리는 비를 쫄딱 맞으며 구경했다. 그렇지만 비를 맞으면서도 쉬이 이 공간에서 발길을 돌리기가 어려웠다. 계속 눈에 담아두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덧 비는 그쳤지만 공기는 여전히 촉촉하다. 마을 곳곳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한 전구 장식들을 걸어놓았지만 사실 이 동네는 낙엽도 채 지지 않았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색색깔의 나뭇잎들과 수도원이 제법 잘 어울린다.


이 동네에선 수도원 구경 외엔 할 게 없다. 진짜 없다. 어찌보면 따분한 일정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그건 여유를 부리고 늑장을 피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간에 쫓길 일이 없으니 천천히 밥을 먹고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걸었다. 리스본보다 훨씬 더 수수하고 심심한 풍경이다. 그나마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장식들이 있어 덜 심심했을 뿐, 불을 밝힌 수도원 외엔 밤풍경조차도 딱히 볼게 없다. 가게들도 몽땅 다 문을 닫아 돈을 쓰려고 해도 그럴 만한 곳도 없다.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차분하고 조용하게, 집에서 가족과 함께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양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지구 반대편에 와서야 겨우 만나는구나.


호텔 방에서 MTV나 보면서 맥주 한 병 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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