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하면서도 결코 쓸쓸하지 않은 풍경

리스본, Lisboa

by 나예

아마도 ‘리스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빛바랜 파스텔 톤의 집들과 가파른 언덕, 좁은 골목길, 빨랫줄에 가득 매달린 빨래 같은 것들은 알파마의 이미지일 것이다. 겨울철엔 비가 자주 오고 날씨가 습해 빨래를 바깥에 널어두는 집은 거의 없지만, 그 점을 제외한다면 이 동네를 거닐기엔 여름보단 겨울이 낫지 싶다. 언덕은 가파르고, 골목은 미로처럼 뒤엉켜있다. 계단들은 끝이 없다. 차로 다닐 수는 없는 동네다. 때문에 여름에는 조금 버겁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런 동네에서 걷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골목과 건물들 사이사이로 누군가 숨겨 놓은 것만 같은 작은 식당과 술집들이 쉼 없이 나타나고, 수준급의 그라피티들도 보여 지칠 틈이 없다. 그러니 알파마에선 별 수 없이 열심히 걸어야 한다. 많이 걸을수록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으니 기꺼이 길을 잃어도 좋다. 하지만 길은 어디로든 이어져있어 내 바람대로 길을 잃고 정처 없이 걷는 것도 쉽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데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나 싶을 정도로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식당들도 모두 저녁 손님맞이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여기까지도 사람들이 알고 찾아오는 모양이지.. 맛집에 대한 열망은 동서양에 관계없이 전인류의 공통적인 마음이구나’ 싶기도 했다.


알파마는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이자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물론 대지진 때문에 상당수 파괴되었지만 암반이 워낙 견고한 동네라 다른 동네보다는 피해가 적기도 했고, 구불구불한 길을 유지해가며 원래 자리에 그대로 재건축을 해 예전의 정취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겐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그 시절에 복원을 쉽게 하기 위해 모두 밀어버리고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단지로 바꿔버렸다면..ㅠㅠ 그런 일은 생각만으로도 엄청난 비극이다.

공중 화장실 벽에 그려진 리스본의 역사


좁고 가파른 언덕의 골목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앞이 탁 트인 포르타 두 솔 전망대가 나타난다. 상 페드루 지 알칸타라 전망대에서 본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의 리스본이 눈 앞에 펼쳐진다. 나는 이쪽의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세련되진 않지만 차분하고 점잖으며, 아련하고 촉촉하면서도 결코 쓸쓸하지 않은 풍경. 포르타 두 솔 전망대에서 마주한 한 컷의 풍경만으로 어느새 리스본을 사랑하게 되었다.


전망대 입구엔 리스본의 수호성인인 ‘상 비센테(빈센트 성인)’의 동상이 놓여있다. 꼭 이 곳이 아니더라도 리스본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상징물 중 ‘배와 까마귀 두 마리’가 보인다면 이는 모두 그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스도교가 금지되어있던 로마 제국 시절, 순교한 그의 시신은 포르투갈의 남쪽 시골 동네인 사그레스에 묻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유해를 리스본으로 옮겨오려고 하였으나 어디에 묻혀있는지 알 수 없었는데 까마귀들이 이를 찾아내 주었다고 한다. 유해를 배에 싣고 리스본으로 모셔오는 동안에도 까마귀 두 마리가 끝까지 동행하며 배를 지켰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배와 까마귀는 상 비센테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런 간단한 이야기를 알고 나니 시내 곳곳에서 보이는 배와 까마귀들이 어찌나 반갑던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늘 진리인 듯싶다.


포르타 두 솔 전망대 바로 근처에 또 다른 전망대도 있다. 산타루지아 전망대가 바로 그것. 고급 주택의 숨겨진 정원 같은 분위기에 규모도 아담한 편이라 못 알아채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사실 위치가 비슷하다 보니 포르타 두 솔 전망대와 보이는 풍경은 비슷하지만 확실히 훨씬 한적하다. 예전엔 아줄레주들이 멋지게 장식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대부분 파손되어 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낮은 동네로 내려와 있다. 알게 모르게 오르락내리락하게 하며 사람 혼을 홀딱 빼놓는 것 또한 리스본의 매력. 재미있는 동네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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