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Lisboa
리스본에서의 첫 숙소는 신시가지에 잡았다. 리스본 대부분의 볼거리는 구시가지에 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다행히도 신시가지에서 구시가지까지는 대로를 따라 그저 쭉 걸으면 쉽게 도착할 수 있다. 그게 싫다면 지하철로 더욱 금방 이동할 수도 있지만 우린 찬찬히 걸어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푸니쿨라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상 페드루 지 알칸타라 전망대(Miradouro de São Pedro de Alcântara)가 나타난다. 리스본의 언덕엔 꼭 전망대가 하나씩 있다. 언덕의 숫자만큼 전망대가 워낙 많다보니 그 중엔 유명한 전망대도 있고 별로 그렇지 않은 곳도 있지만 이곳은 리스본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꼭 한번쯤은 들러보는, 아주 유명한 전망대이다.
붉은 지붕들이 빼곡한 리스본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간다는 건 꽤나 감동적이다. “비록 지금은 네가 날 핍박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나 나나 비슷한 인간이고, 심지어 높은데서 보면 똑같아보여. 하늘에선 우리 둘 다 똑같이 불개미로 보일걸” 하는 점은 크나큰 위안이다. 그리고 그런 깊은 생각 없이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풀리니, 그게 바로 높은 곳의 마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망대를 찾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일 것만 같은 리스본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1755년 11월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의 85%가 파괴되었으며 그 이후 닷새 동안 도시가 불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지진의 규모는 리히터 규모 8.5~9.5로 추정되며, 이는 세계적으로 기록에 남은 최악의 재해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니까 지금 리스본에 있는 건물이나 도로 등은 대개 이 이후에 재건된 것들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그래도 200년은 넘은 것들이니, 우리 기준에서 보면 오래되긴 했다. 하지만 신경써서 복원을 한다고 해도 이전과 똑같이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테고, 복원할게 수천가지인데 자본은 한정되어있으니 아무래도 장식적인 부분은 많이 덜어졌겠지 싶어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 중 하얗고 심플한 외관의 상 호크 성당(Igreja de Sao Roque)은 대지진 때 피해를 입지 않아 지진 이전의 화려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는 몇 안되는 장소이다.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돌을 조각하는 대신 정교하게 무늬를 그려 넣은 아줄레주, 몇 번을 보아도 감탄하게 되는 탈랴 도라다, 일종의 트릭아트처럼 그려진 천장화 등을 구경하느라 눈이 쉴 틈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상 주앙의 성소’는 ‘바로크 예술의 걸작’으로 불린다고 하니 지진 이전의 리스본이 얼마나 호화롭고 예술적인 도시였는지 짐작케 했다.
조금 더 걸어 카르무 수도원(Convento do Carmo) 근처 전망대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지진을 버텨낸 상 호크 성당과는 달리 당시 카르무 수도원은 지붕이 폭삭 내려앉았다. 지금도 여전히 지붕이 없다. 누군가 무의 윗둥을 썰어 없앤 듯, 뚜껑이 날아간 모양새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옆으론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Elevador de Santa Justa)가 보인다. 엘리베이터 위쪽의 전망대 덕에 지금 이 곳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지만 예전엔 윗 동네와 아랫 동네를 연결하는 중요한 대중 교통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실외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니! 물론 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아랫 동네로 갈 수는 있지만 우린 빠르고 쉬운 이동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랫 동네로 향했다. 그 시절엔 증기의 힘으로 가동했지만 지금은 물론 전기로 한다. 그렇지만 크기만 컸지 여전히 구식이라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싣지는 못한다. 그래도 덕분에 아주 편안하게 아랫 동네, 바이샤 지구에 도착했다.
그 어릴 적 내가 다녔던 학교들은 모두 산꼭대기에 있었다. 조그맣던 시절에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진 채 매일 등산을 하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눈이라도 쌓인 날엔 등교 자체가 공포였다. 그래서였을까, 등교하는 길에는 늘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이 길에 에스컬레이터나 무빙 워크(그 당시엔 무빙 워크라는 단어가 없었지만)를 설치해주면 안되나? 언덕을 한 방에 올라갈 수 있도록 아예 엘리베이터이면 더 좋을텐데!’
많은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고 보니 언덕을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와 무빙 워크는 홍콩에 실제로 있었다. 그리고 언덕을 오르는 엘리베이터는 리스본에 있었구나. 내 세상에만 없었을 뿐 지구 어딘가에는 있는 물건들이었구나. 내가 가본 곳과 가보지 않은 곳, 어차피 나의 세상은 이렇게 둘로 나뉘어지니 그 때의 조그맣던 나로선 어쩔 재간이 없었던게 당연한 일이었구나.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나의 세계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모르는 일들이 가득할 또 다른 세계로는 언제쯤 나아가 볼 수 있을까. 낯선 곳에서의 여행은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묵묵히 던질 뿐, 그 답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 답은 '삶'이라는 이름의 긴 여행 속에서 내 스스로 찾아나가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