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노동은 정말로 존엄한가

포르투 Porto

by 나예

오늘은 포르투를 떠나 리스본으로 가기로 한 날이다. 미리 특가로 기차표를 예매해두었기 때문에 다른 변동의 가능성은 없다. 전체 일정으로 보았을 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오늘 포르투를 떠나면 아마 다시는 포르투에 들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살아갈 날들 중에서 다시 이 낭만적인 도시에 오게 될 일이 있을까? 간절히 바란다면야 못할 일도 아니긴 하겠지만, 과연 ‘포르투 재방문’이 내가 간절히 바랄 수 있는 일인지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건 이 도시가 후져서가 아니라 살다 보면 더 급한 일들이 생겨나고 그럴 때마다 여행이나 휴식은 늘 후순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지난 날들 모두 그랬었다. 아마도 그랬기에 지금 이토록 엉망이 되어 여기에 와있는 거겠지. 이 도피를 마치고 내 자리로 되돌아갔을 때, 과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아침, 클레리구스 탑(Igreja dos Clérigos)에 올랐다. 그동안 유럽에서 수많은 탑과 전망대를 올라보았지만 이렇게 계단이 좁은 곳은 처음이었다. 아래에서 올라가고 있는 중에 누군가 위에서 내려오기라도 하면 비켜줄 공간이 없다. 원래는 오르고 내리는 인원을 시간에 따라 제한하는 것 같은데 이른 아침이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인지 관리인이 보이질 않았다. 다행히도 별 일은 없었으나 중간중간 누군가를 마주칠 때마다 서로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조심조심, 최대한 벽 쪽으로 밀착한 채 스쳐 지나야만 했던 경험은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쾌적한 여행을 위해서도 살이 찌면 곤란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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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 오를수록 더 어둡고 더 좁아진다


탑 꼭대기에 오르고 나니 지난 며칠간 발품을 팔아 열심히 걸어 다닌 곳들이 모두 보인다. 이쪽은 가게가 있었고, 저쪽은 카페가 있었지. 저 너머는 가보자, 가보자 해놓고 결국은 못 가보았구나. 택시가 갔던 길이 이쪽 길이었나? 기차역은 어느 쪽이었더라? 하는 식으로 높은 곳에선 지난 며칠 간의 행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 근교를 둘러보느라 정작 포르투 시내에선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같아 뒤늦게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그때 거기 가지 말고 그냥 여기 시내에 눌러앉아있을걸 ‘ 싶었던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후회되는 날 같은 건 없다. 아쉬움은 그것과는 별개인 모양이다. 하긴, 여기에 한 달을 머물렀다 한들 아쉬움이 없었을까. 그렇게 우리의 지난 며칠을 곱씹는 사이 서서히 아침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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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근처의 렐루 서점(Livraria Lello e Irmão)도 문을 열었다.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이니 ‘아름답다’는 것도 그만큼 제각각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꼽는 곳들 중엔 렐루 서점이 꼭 포함되어있으니 안 들러볼 수가 없다.


렐루 서점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아마도 나선형의 빨간 계단 일터. 하지만 사실 이것을 나선형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상상하는 흔한 나선형 계단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으니까. 심지어 이 계단은 나무 계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무도 아닌, 석회에 나무색을 덧칠해 ‘나무인 척’하는 말 그대로 정말 이상한 계단이다. 마치 ‘마법사의 계단’이 이렇게 생겼을까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조앤 롤링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대한 영감을 이 계단에서 받았다고 밝힌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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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문을 연 렐루 서점은 본래 포르투갈의 현대 문학 작가들이 교류하는 ‘살롱’의 역할에 충실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해리포터의 인기 덕에 수많은 사람이 서점을 구경하려고 몰려들기에 입장을 위해 줄을 서야 하는 것은 기본, 심지어 입장권도 구매해야 한다. '잠깐, 서점에 입장료라니? 너무 상술이 심하네. 이곳 주인은 조앤 롤링에게 큰 절이라도 해야겠어’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서점은 책을 팔아야 운영이 되는 운명인데 책은 사지 않고 인증샷만 찍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 정작 책을 읽고 사려고 오던 사람들은 그 어수선한 분위기에 발길을 끊어버렸을 터. 서점 측에서도 고민 끝에 이런 방법을 마련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한편으론 안됐다 싶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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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선 서점은 생각보다는 작았지만 무척이나 우아했다. 이토록 사람이 가득한데도 특유의 우아함을 잃지 않는 공간이라니.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조용히 책을 읽으며 사색에 빠질 수 있을 만한 곳이 못 되는 건 분명했지만, ‘서점’이라는 이름만 없었다면 입장료를 지불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멋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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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빨간 계단에서 사진을 찍고 급히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곤 하지만 사실 계단보다도 더 눈길을 끌었던 건 서점 2층의 스테인드글라스였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심심하지도 않게 꾸며져 있어 전체적인 공간에 차분한 분위기를 더해주던 스테인드글라스. 그 스테인드글라스의 중앙엔 대장장이가 망치질을 하는 모습과 함께 'Decus in Labore'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노동의 존엄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50년 넘게 책을 팔아오던 서점의 진짜 주인 대신 이젠 젊고 빠릿빠릿한 알바생들이 입장권을 팔고, 확인하고, 손님들을 줄 세우고 통제한다. 입장권을 사지 않고 안쪽을 보려고 기웃거리는 공짜 손님들을 쫓아버리는 일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노동의 존엄성’이란 무엇인지, 정말로 모든 노동은 존엄한지 다시금 생각해보았지만 이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꾸는 것이 좋겠다.

과연 이 시대의 렐루 서점은 존엄한가?

렐루 서점에서 행해지는 모든 노동은 정말 존엄한 일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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