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또 다른 시작

카스 카이스 & 카보 다 호카, Cascais & Cabo da Roca

by 나예

우린 여행을 나설 때 ‘무척 멋지지만 잘 알려지지 않아 관광객이 없는 곳’, ‘현지인들만 아는 숨겨진 비밀 장소’ 같은 것을 꿈꾼다. 하지만 냉정히 얘기해 그런 곳은 거의 없다.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거긴 접근성이 후지거나 치안이 나쁘거나 상황에 따라 출입을 엄격히 제한한다거나 등의 제약 사항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멋진 곳은 어떻게든 소문이 나기 마련이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몰려들게 되어있다. 멋진 풍광을 누리고 싶은 것은 나만의 바램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장소를 독차지하겠다는 것도 어찌 보면 여행자의 얄궂은 이기심일 수 있다.


해안 산책로와 잘 정비된 해변이 줄지어 이어지며 휴양지로서의 면모를 뽐내는 카스카이스는 사실 현지인들보단 외지인들, 정확히는 외지에서 온 돈 많은 휴양객들이 많은 곳이다. 카스카이스의 바다는 동네 아이들이 뛰어들어 물장난을 치는 소박한 바다가 아니라 모든 것이 깔끔히 정돈된 고급 휴양지로서의 바다에 가깝다. 그 말을 증명하듯 도로엔 비싼 차들이, 해안가엔 비싼 요트가 늘어서 있기도 했다.

DSC07283.JPG
DSC07282.JPG
DSC07285.JPG
DSC07289.JPG
DSC07294.JPG
DSC07302.JPG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잔잔하고 따뜻한 휴양지로서의 바다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이쪽의 바다는 ‘역시 대서양이다’ 싶게 거대한 파도가 쉼 없이 절벽을 때리고, 바람도 거센 편이라 우습게 봤다간 큰일 날 모양새다. 거칠고 위협적인 바다. 그 고약함은 ‘지옥의 입’이라 불리는 해안 절벽에 뻥 뚫린 구멍만 봐도 바로 감이 온다.

DSC07264.JPG
DSC07270.JPG
DSC07307.JPG 해변 바로 앞 광장의 돌바닥은 구불구불, 마치 파도가 치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 같다.


간단히 카스카이스 해변 산책을 마치고서는 카보 다 호카에서 일몰을 감상하기 위해 서둘러 달렸다. 가까스로 시간은 맞추었으나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우리가 기대했던 그런 일몰은 만날 수 없었다. 하긴, 엽서에 나오는 풍경을 쉽게 만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날씨와 관계없이 이곳의 풍경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칼로 썰어낸 듯 육지가 끝나고 그와는 반대로 끝도 없이 대서양이 펼쳐진 풍경. 방해되는 것 하나 없이 시야 가득 바다가 들어찼다.

DSC07309.JPG
DSC07324.JPG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카보 다 호카. 지구상에 다른 대륙이 존재하는 줄 몰랐던 14세기 말까지 이곳은 ‘완전한 세상의 끝’이라 여겨졌고 지금도 여전히 ‘세상의 끝’이라 불린다.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인 카몽이스가 말했듯, 이곳은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다.


포르투갈은 섬나라가 아니지만 부단히 바다와 싸워온 나라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유일하게 맞닿아있는 거대한 스페인과 부담스런 소모전을 벌이느니 일치감치 바다로 눈을 돌리는게 여러모로 더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세상의 끝’은 바다로의, 다른 세상으로의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건지도 모른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바다로 나아가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던 이들처럼 우리도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여행을 마치고 우리의 자리로 되돌아갔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이날의 카보 다 호카는 워낙 바람이 거세어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파도도 바람만큼이나 요란스러웠다. 대자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웅장함과 그 경이로운 힘 앞에 서니 왠지 모를 허무함이 몰려왔다. 바닷바람 앞에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인 인간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 물어뜯고.. 참으로 우스운 꼴이다.


이 곳에서는 땅 끝에 다녀갔다는 인증서를 받을 수 있다. 상술에 불과한 한갓 종이조각일 지도 모르지만 이 곳에 우리가 서있었다는 기억이 희미해질 때 즈음에 다시금 지금의 감정을 떠올리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인증서도 챙겨넣었다. 아직까지는 이 인증서를 다시 펼처본 적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니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올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날에 여행 앨범과 함께 꼭 다시 펼쳐보리라.

IMG_5056.JPG
DSC07327.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