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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30. 2023

음유시인의 따스함을 담아, 빌보 트루바도르

이번에 해외배송으로 받은 그릇 상자의 포장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전에도 몇번이나 거래를 했던 바이어였고, 이렇게 포장을 허술하게 해서 보내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이상하다 생각했다. 포장 상태가 허접할 경우 배송 중에 파손될 위험이 높은 것이 바로 그릇이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다급히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는 낯선 종이 쪽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인천 공항 세관에서 내 상자를 미리 열어보았다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가끔 세관에서 무작위로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간 단 한번도 직접 겪은 적은 없었지만. 그 날이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하필 이번 그릇은 빌레로이앤보흐 트루바도르 라인의 컵과 소서, 그리고 커피 팟이었다. 불어로 ‘음유시인’을 뜻하는 트루바도르는 그 명칭에 걸맞게 말을 타며 나팔을 불고 있는 예술가의 모습과 파랑새와 함께 시구를 읖조리며 걷고있는 음유시인의 모습이 몹시도 깜찍하게 표현되어있는 것이 대표 이미지다. 음유시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할 수 있는데, 나는 이 단어를 아주 어렸을 적에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에서 배웠다. 발길 닿는대로 세상을 떠돌면서 악기를 연주하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짓는 이른바 한량. 풍류를 즐기는 나그네일 수도, 보헤미안의 감성을 품은 방랑자일 수도 있을 법한,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법한 바로 그런 존재. 요즘 세상에서라면 그런 컨텐츠들을 활용해 유튜버나 틱톡커, 또 다른 스킬을 곁들여 노마드 족 정도가 될 수도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음유시인은 경제적인 문제들에 발목을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상의 동물인 유니콘 급 존재다. 현실 속에서 만나기는 어렵지만 무민의 스너프킨을 비롯, 여전히 수많은 만화와 게임에 등장한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아무튼 트루바도르 라인의 물건들은 꽃과 나비, 나뭇잎 등이 인물 주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어 자칫 정신이 없을 법도 한데 붉은 계열의 컬러가 영리하게 빠져있어 무릇 차분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모든 장식들이 전부 핸드페인팅인 것도 매력 요소다. 이 물건들은 애당초 생산량이 많지도 않았고 지금은 단종까지 됐는데 찾는 사람은 여전히 많아 현지에서도 꽤 구하기 힘든 물건이다. 워낙 희소하기 때문에 좋은 컨디션의 물건을 구하기는 더 힘들다. 나도 오랜시간 찾다가 최근에야 겨우 구했고 그나마도 2인 세트로 구하지 못했다. 1인 세트의 구색을 갖출 정도만 겨우 구했다.

 

그런데 배송 중에, 심지어 인천까지 잘 놓고 우리 집으로 오는 중에 깨지기라도 했다면! 머리털이 삐죽서는 느낌으로 다급하게 내용물을 확인했다. 확인해보니 커피 팟만 열어봤던 것 같고 컵과 소서는 손도 안댄 분위기였다. 커피 팟을 대충 감싼 비닐들을 순식간에 풀어 헤치고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무사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왜 세관에서 내 상자를 열었는지, 그리고 왜 하필 커피 팟만을 확인했는지 대강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커피 팟 안에 낱개 포장된 초콜릿과 젤리가 잔뜩 들어있었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세관 신고서에는 초콜릿과 젤리가 딱히 기록되어있지 않았을 테고, x-ray 상에는 비어있어야 마땅한 커피 팟 안에 뭔가가 가득차있는게 보이고, 심지어 요즘은 각종 마약 밀반입 등으로 시끄러우니 수상쩍다 싶어 확인해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애당초 내가 주문하지 않은 초콜릿과 젤리는 왜 들어있었을까? 이 물건을 찾아서 보내준 바이어는 나와 그간 여러번 거래를 했던 분이고, 이제는 단순한 판매자와 구매자를 넘어 온라인에서나마 인간적으로 왕래하는 사이다. 때문에 커피팟 안에 우리 아이와 함께 나눠먹으라며 독일제 간식거리들을 선물로 가득 담아주셨던 것이다. 결국 다들 본인의 자리에서 본인의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벌어진 해프닝이라는 결론. 착실하고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내가 사는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일련의 일들을 겪었지만 그 일들이 전부 긍정적인 기운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사실까지 받아들이고보니 우리 집으로 입성한 음유시인이 더욱 사랑스럽다. 그 온기를 곁에 두고 더 따뜻한 마음을 더해 에그타르트를 잔뜩 구웠다. 전할 수만 있다면 음유시인이 우리 집까지 오는 길에 마주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 온기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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