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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Apr 01. 2023

쉬이 사라지고 이후 남는 것, 차이나 펄 식기 세트

앞서 오발 형태의 접시가 왠지 모르게 더 센스있어 보여 평소에 자주 사용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뒤집어말하면 원형 접시는 평소가 아닌, 특별한 날에 주로 쓴다는 말이 된다. 돌아보면 정말 그랬다. 특별한 날이라고 해봐야 그닥 난이도 있는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동그란 접시에 반듯하고 차분하게 정리하면 좀 더 기품있고 우아한 느낌을 낼 수 있다. 즉, 나는 일상적으로 마구 담아 먹는 것은 오발에, 나름 신경을 써 조심스레 플레이팅하는 것은 원형에 한다. 이 원칙은 전적으로 내가 혼자 정한 것이고 내 취향에 기반한 것이므로 누군가는 정반대로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종의 원칙이라고는 해도 “오늘은 보통 날이니까 원형 접시는 절대 안돼!” 라고 한 적은 당연히 없다. 어쩌다보니, 살다보니 어느 정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일 뿐이다.

 

오발에 동적인 리듬감이 있다면 원형에는 정적인 차분함이 있다. 때문에 음식에 힘을 줄 때 접시까지 오발이면 다소 투머치인 느낌이 든다. 진짜 고수는 그 미묘한 선을 지키며 최상의 식탁을 꾸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방면의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내가 좋아서 내 방식대로 상을 차리는 사람인지라 매사 대충대충한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장식의 디테일이나 전체적인 색감보다도 접시의 모양 자체에 큰 부분이 좌지우지된다는게 다소 희안하기는 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눈에 그렇다는거다. 좀 더 왁자지껄 와글와글 하는 느낌을 내고싶을 때는 사각 접시도, 사이즈가 작은 애들도 마구 섞어 쓴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전체적인 중심을 잡아주는 애는 언제나 커다란 원형 접시여야 한다는게 나의 지론이다.


말해뭐해 싶을 소리지만 나는 원형 접시도 꽤 여럿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접시는 원래 원형이다. 작은 원형 접시는 콩접시 느낌으로 귀엽고 커다란 애는 그 나름대로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있다. 나는 대부분의 식기를 단품으로 구매하는 사람이라 구색을 갖춘 세트로 갖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내가 꽤 자주 쓰는 큰 원형 접시 중에 이런 세트의 일원인 녀석이 하나 있다. 세트라고 해봐야 큰 원형 접시와 빵 접시로 나온 작은 원형 접시, 스프볼, 그리고 컵과 소서가 전부다. 그나마도 컵과 소서는 둘 곳이 없어 몽땅 처분했다. 전부 예전에 할머니가 썼던 물건이다. 이 물건은 바닥에 China Pearl 이라 쓰여있는데 구글링을 해봐도 딱히 내용이 없어 구체적으로 어떤 그릇인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지만 워낙 그릇에 애정이 있던 분이니 에지간한 수준 이상의 물건일 것 같기는 하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딱히 상관은 없는게, 이미 내가 굉장히 여러번 썼다. 최초 가격이 얼마였든지 간에 긴 세월 동안 그 뽕은 뽑고도 남았다. 본 차이나가 아니라 파인 차이나인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내 기대보다 더 저렴한 물건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뽕을 수십 번은 더 뽑은 셈이니 오히려 좋다.

 

본 차이나(bone China)는 이름 그대로 동물의 뼛가루를 넣어 만든 도자기를 뜻한다. 간혹 ‘bone’ China를 ‘born’ China로 오해하고 ‘중국산 도자기’라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 차이나는 본래 영국에서 시작된 애다. 지금이야 bone China 중에도 born China가 있겠지만. 그 중 파인 차이나(fine China)는 본 차이나에 비해 뼛가루 함량이 낮은 애를 뜻하는 명칭. 그만큼 좀 더 저렴하고 가성비가 좋은 물건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얘 또한 본 차이나가 맞긴 맞다. 

 

포슬린이나 스톤웨어 등이 요즘 대세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본 차이나가 좋다. 과거 어르신들 세대에서는 좋은 도자기가 곧 본 차이나로 통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기도 해서 우리 엄마 또한 어딜가면 아직도 “이거 본 차이나에요?”를 물어본다. 요즘 트렌드가 아니다보니 그릇을 잘 모르는 분들은 도리어 “본 차이나가 뭐에요?” 고 되묻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본 차이나 특유의 강점은 명확하다. 튼튼하고 가볍다는 것! 무거워도 잘 깨지는 접시가 있고 가벼워도 튼튼한 접시가 있다. 두꺼우면서도 가벼운 접시가 있고 얇으면서도 은근 무거운 접시가 있다. 나는 일단 가벼운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무거우면 자주 쓰기가 힘들다. 게다가 더 큰 문제도 있다. 바로 수납. 주방의 상부장에 접시를 차곡차곡 포개어 넣던 어느 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상부장이 내려 앉다 못해 완전히 무너져 내려 대 참사가 벌어졌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 접시는 최대한 여기저기 분산해 보관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역부족이다. 절대량이 많으니 별 재간이 없다. 그럴까봐 아예 상자에 넣어 침대 밑에 넣어둔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렇게 하면 나는 내 성향상 영원히 꺼내지 않을 것만 같다.

 

푸르스름하면서도 은근하게 회색 빛이 도는 바탕에 여리여리하게 표현된 하얀 꽃무늬, 그리고 실버 림이 둘러진 이 접시는 요즘 접시들이 추구하는 차분함과는 다소 다른 느낌의 차분함을 자아낸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도 망가진 곳 하나 없고 여전히 현역으로 빛을 발한다. 동양적 분위기인 듯 하면서도 서양의 냄새도 슬쩍 나는게 한식 양식 가릴 것 없이 잘 어울려 마구 쓰고 있다. 세트 안에 함께 있는 스프볼도 은근 여기저기 쓰기 좋게 둥글 넙적한 형태라 죽을 먹을 때도 쓰고, 만두를 먹을 때도 쓴다. 떡국도 가능하고 볶음밥이나 덮밥류에도 좋다.

 때때로 너무 예쁜 그릇은 용도를 고민하지 않고 일단 들여놓는 경우도 있지만, 일상 속에서 치이다보면 그런 것들은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된다. 그릇은 특수 생활 폐기물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려야 해 버리는 일도 쉽지 않으니 결정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떤 물건을 갖고 싶어 오래도록 고민하고 나름 신중하게 결정을 해도 막상 내 것으로 만들고 나면 그런 간절함은 사라진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그 물건이 주는 반짝임 또한 순간일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쉬이 사라진다면 이후 남는 것은 뭘까? 나는 그게 결국 일상성이라 생각한다. 편하게 자주 쓸 수 있다는 것, 아무렇지 않게 곁에 둘 수 있다는 것. 특히 그릇은 더더욱. 먹고 사는 일은 결국 일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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