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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31. 2023

무민 가위, 피스카스 주방가위

그간 평범한 보통의 주방 가위를 사서 쓰다가 칼날이 무뎌지면 종종 집 앞으로 찾아오는 칼갈이 아저씨에게 가져가 갈곤했다. 요즘은 워낙 저렴한 가위가 많다보니 가위를 가는 가격이면 새 가위를 살 수도 있다는게 늘 고민스러운 부분이었는데 어느 날부터는 이 아저씨가 오지 않게 되면서 그런 고민을 할 여지 자체도 사라졌다. 하지만 가위날이 무뎌진다한들 아예 사용이 안될 상황까지는 아니니 ‘더 쓸려면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싶은 물건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 것으로 들이는 결정이 쉽지는 않다. 이건 어떤 물건의 가격이 비싸고 싸고와는 좀 다른 문제다. 주방에서 쓰기 어려운 수준이라해도 하다 못해 택배 상자를 뜯을 때라도 쓸 수 있으니까. 쓰임이 있는 물건을 포기한다는건 나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구질구질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잘 드는 가위와 그럭저럭 드는 가위, 그닥인 가위 등을 포함해 우리 집에는 꽤 여러 개의 주방 가위가 있다. 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위는 무민 가위다. 나는 아주 예전부터 일명 무덕이었다. 오래전부터 무민에 빠져 무민 관련 굿즈들을 직구로 사들이고, 해외(특히 일본)에 나갈 때마다 잔뜩 사들이기 바빴다. 어쩌다 무민을 알게되었는지는 너무 오래 전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비주얼 뿐 아니라 그 시리즈(무민은 본래 소설, 그림책, 신문에 수록되는 만화로 시작했다)에 담긴 철학이나 분위기 같은 것을 몽땅 다 좋아한다. 무민 가위도 그냥 그렇게 무민이 그려져있어서 입양했다. 너무너무 귀여운 가위! 하는 정도의 인상으로 가볍게 들였는데 직접 써보니 기대 이상으로 절삭력이 좋고 오래도록 가위질을 해도 손이 너무 편한 것이다! 지구상에 이런 가위가 있었어하는 심정이 되었다.

 

세상에 잘 드는 가위는 많다. 오래된 싸구려 가위도 갓 갈아오면 그 순간만큼은 완벽한 절삭력을 뽐낸다. 하지만 이 가위는 뭔가 달랐다. 손의 곡선에 맞게 자연스럽게 휘어진 형태의 손잡이가 내 손에 착착 붙는 엄청난 물건이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이 가위는 피스카스라는 브랜드와 무민이 콜라보를 해 만들어진 물건이었고 피스카스는 60년대부터 시작된 핀란드의 수(手) 공구 전문 브랜드였다. 무려 명품 브랜드의 장인들이 쓰는 가위라는 소문까지 있는 브랜드였다. 이 가위가 단순히 무민의 옷만 입은 깜찍한 가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대단한 물건이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재료 손질부터 다 조리된 요리에 이르기까지 나는 주방에서 가위를 참 많이 쓴다. 가위 대신 칼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긴 하지만 칼을 쓰게 되면 도마도 써야 하니 설거지거리가 늘어나게 되어 너무 귀찮다. 식탁에서 가위를 쓰는건 한국인이 유일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일본에서도 고기를 구워 먹을 때는 가위를 쓰니 사실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건 ‘가위는 한국인만 씁니다’ 하는 명제 같은게 아니라 똑같은 구운 고기라 할 지라도 칼로 썰어먹는 고기와 가위로 잘라 먹는 고기는 완전히 다른 음식이라는 것이다. 작게 잘린 고기 조각이라는 결과물을 넘어서 자른다는 그 행위 자체에도 더 적절한 도구가 있다. 노릇노릇 바삭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칼로 썬다? 쫀득하게 볶아진 쭈꾸미를 칼로 쪼갠다? 절대 안될 말이다! 누군가는 ‘이가 없으면 잇몸이지, 뭐가 됐든 작게 자르기만 하면되는거 아냐’ 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기술의 수준과 사용 목적에 맞는 물건은 따로 있고 그 디테일은 그 디테일에 집중하는 사람에게만 진가를 발휘한다. 역시 나같은 인간에게 미니멀 라이프 따위가 가능할 리 없다.

 

물론 모든 물건을 다 제각각의 용도에 맞게 구비할 수는 없다. 사수할 부분은 사수하되 포기할 부분은 포기해야 한다. 어떤 부분을 사수하고 어떤 부분을 포기할지 결정하려면 내가 무엇에 더 중점을 두는 사람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비장한 자세로 자아를 찾고, 거창하게 꿈을 찾기 전에 본인의 호불호와 취향부터 알았으면 좋겠다. 이것만 명확해져도 삶은 훨씬 단순해진다. 삶이 단순해지면 오만가지 바람에 흔들릴 일도 자연히 줄어든다.

 

아이가 생기고나서는 가위를 더 많이 쓰게됐다. 고기를 비롯, 브로콜리도 딸기도 사과도 전부 작게 싹둑싹둑 자른다. 피스카스의 무민 가위는 아니지만 이런 용도로 아예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가위도 따로 있다. 그렇지만 역시 다른 가위를 쓸 때마다 무민 가위가 더 생각난다. 다시금 생각해보니 무민이 아니었다면 이 가위를 만나지 못했을 터. 새삼스럽게 무민이 더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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