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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29. 2023

최소한 이 정도는, 오벌 형태의 접시들

주방에 상부장을 없애고 오픈형 선반으로 대체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조차도 시원하게 없애 깔끔하게 연출한 주방이 인기인데 전자는 우리집 고선생 때문에 절대 불가하고 후자는 수납할 그릇의 양이 많으니 이 역시 절대 불가다. 미니멀 라이프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 집은 이미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다. 미니멀 라이프와 관련하여 어디선가 딱 한 벌의 식기만 두고 쓴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여벌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부지런해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침 먹을 때 쓴 그릇을 바로 씻고 말려야 점심 먹을 때 다시 쓸 수 있는거고 저녁도 마찬가지니까. 일단 나는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죽을 때 다 짊어지고 죽을 것도 아닌데 저 그릇들을 다 어찌할꼬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 또한 미니멀하게 살아볼까 싶어질 때도 있는데 그날 그날의 메뉴와 기분에 맞춰 다른 식기를 사용하는 기쁨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이내 마음을 돌린다. 애당초 내 마음 자체가 미니멀하지 못하다. 나는 내 자아가 생긴 이후부터는 계속 디테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나는 많은 것도 아니야! 더 많은 사람들도 많을걸! 이라는 생각도 한다.

 

우리 집에는 접시가 많다. 한식에 필요한 밥 공기와 국그릇, 사발이나 반찬 그릇 등은 절대적으로 적다. 한식이 밥과 국 혹은 찌개, 메인 반찬과 밑반찬 여러가지를 포함하는 n첩 반상으로 대표된다면, 나는 한식을 거의 아니 어쩌면 아예 먹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될지도 모른다. ‘반상’이라는 말 자체가 결국 ‘밥’이 메인이라는 의미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집에서 밥을 메인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우리 집은 거의 원플레이트로 식사를 한다. 하나의 접시에 생선 혹은 고기 몇 덩이, 현미밥 한 스쿱, 곁들일 야채, 하는 식으로 구성한다. 이런 스타일로 식사를 내려면 커다란 접시가 필수여서 우리 집엔 한식용 식기들보다는 중간 사이즈 이상의 큰 접시가 더 많다. 또한 하나의 접시 위에 맥락없이 이것저것 담다보면 아수라장이 되기 십상인지라 역시 접시는 무던한 디자인과 컬러인 쪽이 편하다.

 

그 중 내가 자주 쓰는 것은 오벌, 타원 형태의 접시들이다. 평면의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자취가 원이라면, 서로 다른 두 점에서 잰 거리의 합이 일정한 점들의 자취는 타원이 된다. 어려운 정의다. 쉽게 생각하면 원을 찌그러트린게 타원인데 불규칙하게 엉망으로 찌그러트린게 아니라 한 방향으로 늘이거나 줄인 모양새다. 원에 지름이 있다면 타원에는 장축과 단축이 있다. 타원의 지름 중 긴 쪽이 장축이고 짧은 쪽이 단축인데 장축과 단축의 차이에 따라 타원은 비교적 원에 가까울 수도 있고 아주 납작해질 수도 있다. 그 때문일까, 오벌 접시에는 반듯한 원형 접시에서는 느끼기 힘든 나름의 리듬감이 있다. 그리고 쓰다보면 왠지 모르게 원형보다는 오벌 형태가 더 편하다. 대충 담아도 왠지 더 센스있게 보이기도 하고 물리적으로 팔을 조금이나마 덜 뻗어도 되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비슷한 이유에서 설거지도 좀 더 편하다. 할 수만 있다면 움직임은 최소화하고 싶다. 그렇게나 게으른 주제에 아무데나 담아 아무렇게나 먹는 것은 또 용납하지 못한다. 가끔은 나조차도 내 비위를 맞추는 일이 어렵다.

 

예쁜 그릇에 예쁘게 담아 대접받는 느낌을 누리고 싶다는 높은 차원의 바람은 아니다. 도리어 그보다는 ‘그래도 최소한 이정도는 지켜야지’ 하는 마지노선의 느낌이다어쨌거나 나는 오늘도 접시를 고른다. 골라봐야 그게 그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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