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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27. 2023

나만의 엑스칼리버, 빨간 감자칼

나는 그릇을 좋아하는 동시에 이것저것 요리하는 일도 좋아한다. 어렵거나 복잡한 요리는 하지 않는 선에서 매끼를 거의 직접 해먹고 건강상의 이유로 인해 키토 스타일의 베이킹도 자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칼질하는게 정말 싫다. 요리에 있어 칼질은 필수적인데 내 살림을 차린지 10년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칼 잡는 일이 무섭다. 다행히 주방에서 행해야 하는 모든 칼질이 다 무서운 것은 아니어서 깍둑썰기 같은 것은 그럭저럭 두려움 없이 해낼 수 있다.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은 과일이나 야채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사과를 깎는다고 했을 때, 한 손으로는 칼을 쥔 채 힘을 주어 밀어주고, 다른 손으로는 사과를 쥐면서 껍질 아래로 밀려들어오는 칼날에 엄지 손가락을 자연히 접촉하게 되는데 나는 이 일이 몹시도 소름끼치고 오금이 저린다. 몇 년 전엔 이런 나를 대신해 남편이 파파야를 깎다가 본인 손가락을 깎아 응급실로 달려가는 일까지 있었다. 칼에 베인거니 몇 바늘 꿰매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예상과 달리 응급실의 의사는 우리에게 당장 수지접합전문 병원으로 가라는 무시무시한 진단을 내렸다. 남편을 병원으로 보내고 피가 흩뿌려진 주방을 나 홀로 정리하며 ‘역시 칼은 무서워 라는 확신을 품었고 그 날 이후 파파야는 우리 집에서 영원히 추방됐다. 파파야는 죄가 없지만 파파야를 비롯, 과일 자체를 한 동안 아예 먹지 않고 살았다.

 

내가 택한 차선책은 감자칼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기억조차 나지않는 빨간 플라스틱 손잡이의 조악한 감자칼이 주방 서랍 안에 잠들어 있어 이 녀석으로 세상 모든 야채와 과일을 손질했다. 감자와 고구마, 당근, 무와 우엉, 연근 등은 물론이고 사과도 참외도 하다못해 키위도 전부 이 녀석으로 껍질을 깠다. 감자칼도 손을 베일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내 기준에서 일반 식칼이나 과도보다는 그나마 안전하다 싶고 슥슥슥슥 하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이 모습을 본 어르신들은 사과를 감자칼로 깎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며 기함하곤 했는데 그 뒤로 어르신들을 집으로 모실 때는 오렌지나 딸기 등 그런 쿠사리를 들을 일 없는 과일만 낸다.

 

이 도구의 이름과 생김새는 무척 다양하다. 요즘은 감자칼보다는 야채칼, 야채필러 등의 이름이 더 널리 쓰이는 것도 같다. 면도기를 닮은 듯한 Y자 형태인 것이 가장 흔하지만 연필을 깎는 느낌으로 껍질을 벗기도록 길쭉한 형태인 것도 있고 몸체까지 전부 다 스뎅인 것도 있고 아예 기계의 형태로 나오기도 한다. 양면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채칼 겸용이 되는 것도 있다. 시장에는 일본 물건들이 유독 많은데 스위스 국기가 그려진 빅토리녹스나 쌍둥이칼로 알아주는 헹켈, 휘슬러같은 유명 브랜드에서 내는 제품들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쓰는 물건은 그런 물건이 아니다. 일단 ‘필러’ 같은 영어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않는다. 그냥 이건 감자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칼도 마찬가지지만 감자칼 또한 칼날이 무뎌지게 되면 사고가 생긴다. 식칼이나 과도야 칼갈이집에 가서 갈 수라도 있지만 감자칼은 소모품이다. 지금 쓰고있는 녀석도 워낙 오래 썼으니 곧 그렇게 되지않을까하는 걱정과 어쩌면 더 안전하고 편한 감자칼이 있을지도 몰라 하는 기대로 나는 여태까지 정말 많은 감자칼을 써봤다. 유명한 브랜드의 비싼 물건, 남들이 좋다는 물건이 나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어서 안타깝게도 나는 이 빨간 감자칼을 능가하는 물건을 찾는데 끝내 실패했다. 어떤 것은 감자 위에서 헛돌고 어떤 것은 힘을 너무 많이 줘야해서 조절이 잘 안되고 어떤 것은 내 손을 같이 긁을 것만 같아 ‘구관이 명관’이라는 캐캐묵은 말과 함께 나는 늘 낡아빠진 빨간 감자칼로 되돌아갔다. 물론 이 칼이 절대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은 아니다. 칼의 사용감이란 사용하는 이의 손 사이즈, 악력, 칼을 미는 힘과 손목의 각도 등에 크게 좌우된다. 맞춤 수제 구두도 아니고 기성품으로 감자칼 하나를 만들면서 그런 것들을 세세하게 고려할 순 없을테니 결국 이것저것 써보며 나에게 잘 맞는 감자칼을 찾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다. 단적으로 남편에게는 이 칼이 너무 작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엑스칼리버나 다름없는 물건인지라 똑같은 녀석으로 다시 사고 싶어 이리저리 찾아봤지만 상표조차 새겨져 있지 않고 워낙 오래된 물건이기도 해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즈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빨간 감자칼’로 검색했는데 우연찮게 이건가? 싶은 물건을 찾긴 찾았다. 자장면 한 그릇이 7,000원에 육박하는 시대에 놀랍게도 가격은 1,000원. 기본 택배 배송비보다도 싼 물건을, 심지어 이런 조악한 비주얼의 물건을 굳이 내가 온라인에서 주문했을 것 같지는 않고, 어디선가 사은품으로 받았나? 아니면 지하철 노점상에게서 샀던 걸까? 여전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생김새가 굉장히 유사하긴한데 이 물건이 정말 같은 물건이 맞을지도 확신은 없어서 주문을 하고 두근두근 하며 기다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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