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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26. 2023

그 물건의 쓸모, 에그스탠드

앞서 커피잔에 티를 마시든 찻잔에 커피를 마시든 그건 본인의 자유라고 쿨한척 하며 잘도 썼다. 그렇지만 그건 컵을 컵으로 쓴다는 대전제는 지키는 안에서의 자유다. 컵을 대신하여 밥그릇에 물을 마신다든가 하는 일은 내 스스로 절대 허용이 안된다. 사실 스님들이 발우공양 하듯 식사를 마친 후 그 밥그릇에 물을 담아마시는 일은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예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 분들도 그렇게 했는데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남이 먹던 그릇이 아니라 내가 먹던 그릇이니까 괜찮아 하고 생각하며 이해하려 아무리 노력해봐도 심정적으로 일단 비위가 상하는 바람에 점점 어른들과 같이 식사하는 일이 싫어졌다. 밥은 밥그릇에, 물은 물컵에 하는 것은 이후 내게 일종의 신념 같은 것이 되었다. 

 

정해진 용도대로만 사용한다면 에그 스탠드는 참 쓸 일이 드문 물건이다. 오로지 삶은 달걀을 올려두기 위한 그릇이라니! 삶은 달걀은 껍질을 몽땅 벗겨 먹는 쪽이 더 익숙하거니와 애당초 삶은 달걀을 단독으로 그리 자주 먹지도 않으니까. 그럼에도 에그 스탠드는 꽤 마니아층이 두터운 물건이다. 그 깜찍한 비주얼에 일단 입덕하고 나면 출구가 없을 지경이다. 나도 정신을 차려보니 꽤 여러개를 갖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슈나우저의 등 부분에 달걀을 올릴 수 있게 제작된 물건을 좋아한다. 제작자는 강아지가 달걀을 짊어진 모습을 의도했겠지만 내 눈엔 그보다도 강아지가 갑분 낙타가 되는 느낌이라 재미있다. 토끼가 달걀을 들고 있는 형태도 있는데 이건 심플하고 예쁘긴 해도 딱히 재미는 없다. 고블렛잔을 줄여놓은 듯한 심플한 형상인 것은 더 재미 없다. 그래도 가끔은 테이블 무드에 따라 이런 애들이 유용할 때도 있다.

 

에그 스탠드를 쓴다는 것은 달걀을 숟가락으로 퍼먹겠다는 뜻이다. 달걀을 거꾸로 뒤집어 작은 숟가락으로 탁탁 쳐서 살짝 깬 후 그 부분부터 파먹는다. 먹으면서 달걀 안쪽에 중간중간 소금을 쳐야하기 때문에 입구가 좁은 소금병이 있으면 편리하다. 에그 스탠드와 작은 숫가락과 작은 소금병을 동원하면 뻔한 달걀을 좀 더 아기자기 하게, 소꿉놀이하는 기분으로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내 기준에서 이 물건의 장점은, 달걀을 좀 더 반숙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 어차피 퍼먹을거니 아예 수란 정도의 느낌도 가능하다. 요즘 온라인에서는 수란이라는 말보다 어째 온센다마고라는 말이 더 인기인 것 같긴 한데 그게 그놈이다어차피 한국의 엔간한 가정집에서 진짜 온천물로 진짜 온센다마고를 만들순 없다

 

에그 스탠드를 캔들 홀더로, 소스 그릇으로, 간장 종지로도, 슈가볼로도심지어는 작은 화분으로도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집은 고선생이 계셔 캔들은 쓸 일이 없고 케첩같은 것은 그냥 메인 접시 한 켠에 쭉 짜면 될 일이며 간장 종지는 어차피 많이 있다. 설탕은 먹지 않고 나의 무심한 성격으로 인해 식물도 못 키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얘를 어디에 어떻게 더 써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머리를 쓰기가 싫다. 나는 이 물건을 얼마에 샀는가과연 나는 이 물건에 있어 뽕을 뽑았는가, 이 물건의 가성비를 논할 때 자신 있게 답을 할 수 있는가, 따위를 염두하면서 그렇게 치열하고 야무지게 살기가 싫다. 본래 수집이라는 것은 그런 효용성을 따지는 일이 될 수가 없다예뻐서 모으고 귀여워서 모은다그것을 소유하고 내 눈 앞에 가까이 두고 내가 원할 때 만져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고민을 해야 한다면 오늘은 완숙을 먹을까, 반숙을 먹을까, 반반숙을 먹을까 정도를 고민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내 고민과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를테면 반숙을 의도했는데 완숙이 되어버렸다거나 반대로 반반숙이 되어버렸다거나 해도 아무렇지 않게 퍼먹을 수 있는 무던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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