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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25. 2023

나의 첫 빈티지, 아라비아핀란드 로즈마린

벌써 아주 오래전 일인데 나는 빈티지를 아라비아 핀란드로 시작했다. 남이 쓰던 물건을 사고 파는 중고거래는 그 전에도 이미 흔했기 때문에 빈티지라는 것에도 별 반감은 없었다. 심지어 이 때는 누군가 먹다 남긴 허니버터칩도 중고거래가 되던 시절이었다남이 쓰던 컵이나 그릇을 사는 것은 비교적 무난한 일이었다다만 빈티지는 해외 현지에서 바이어가 바잉하여 국내로 보내주는 과정에서 해외 배송이라는 관문을 거칠 수 밖에 없다보니,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빈티지가 아니어도 세상에는 예쁜 그릇이 넘쳐나는데?’ 하는 정도의 생각만 했었다.

 

어느 봄 날, 오카야마의 한 카페에서 따뜻한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유명한 카페도 아니었고 커피 값이 비싼 곳도 아니었다. 규모도 작았다. 오래된 상가 건물 2층에 자리한 평범한 카페였는데 창 밖으로 싱그러움을 뽐내는 가로수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게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날 내 눈길을 사로 잡았던 것은 바로 커피 잔이었다. 적당한 그립감과 무게감. 입술에 닿는 느낌도 두께도 무척 좋았다비주얼은 또 어떤가수수한 듯하면서도 은근 세련됐다칙칙하지 않으면서 차분하고 고급스런 갈색톤의 붓터치까지.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인데? 재빨리 소서를 뒤집어봤다. 그간 말로만 듣던 북유럽 스톤웨어의 대표주자, 아라비아 핀란드의 로즈마린이었다. 

 

이 라인을 실물로 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는데 그간 사진 속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예뻐 진심으로 한 눈에 반했다. 로즈마린 라인은 1961년부터 1972년까지 생산된 후 단종되어 현재는 빈티지가 아니면 구할 수가 없는 물건이다. 빈티지 시장 안에서 대략적인 가격대가 형성되어있기는 하지만 일단 단종이 된 애들은 기본적으로는 부르는 게 값이다. 나는 이런 잔을 아무렇지 않게 영업장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예쁜 티스푼이나 작은 포크 등이 곧잘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찻잔은 괜찮은걸까? 너무 커서 몰래 가방에 넣기는 어려우니까? 고의가 아니어도 만약 손님이 실수로 깨트리기라도 하면? 칼같이 변상을 받을까? 얼마를 변상하라고 할까? 등 온갖 생각이 다 었다내가 마치 이 카페 사장이기라도 한 양카페 사장으로 갑자기 빙의해버린 나 자신을 보며 나 스스로도 좀 당했다.

 

이후 바이어를 통해 전달 받아 내 것이 된 찻잔은 더욱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카페에서 내어줬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물건을 골랐는데 알고보니 커피잔이 아니라 찻잔이었다. 커피잔은 컵의 지름이 더 작고 높이가 높은, 다소 머그잔스러운 형태고 찻잔은 기본적으로 지름이 더 크고 높이는 낮다. 좀 더 공부해보니 기본적으로 차는 향이 중요해 향이 잘 발산될 수 있도록 잔을 넙적하게 만들고, 찻잎에서 우러나는 수색을 감상하는 것도 찻자리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보니 이를 명확히볼 수 있어야 해 잔의 깊이도 얕다고 한다. 잔 안쪽에 무늬가 있는 경우도 대개 찻잔이라고. 하긴, 커피를 담으면 잔 안쪽 무늬는 확인이 안될테니까. 물론 이건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 어떤 형태의 잔에 무엇을 마시는지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다. 커피잔에 티를 마시는 날도 있고, 널따란 찻잔에 커피를 한가득 마시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은 머그잔에 무려 소주를 마실 때도 있다그날 그날의 컨디션과 기분에 맞춰 선택할 수 있면 나는 그걸로 되었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차분한 회색과 갈색이 잘 어우러진 로즈마린은 그 색감 덕분인지 가을에 잘 어울린다는 평이 대세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봄날에 어울리는 잔으로 기억된다. 잊고 살다가도 나무들에 초록순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다시금 생각이 나 꼭 한 번은 꺼내어 사용하게 된다. 어떤 계절은 그릇으로 기억되기도 하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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