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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24. 2023

스뎅병에 걸렸어요, 스테인레스 티팟

나는 꽤 오래전부터 스뎅병에 걸렸다. 스뎅은 보통 스테인레스를 일컫지만, 내가 말하는 스뎅병은 꼭 스테인레스만을 얘기하는건 아니고 주석, 실버 등 은빛이 나는 금속 식기들을 모두 포함하는 욕심이다. 꼭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빛나는 고고한 실버웨어가 아니어도 상관 없다. 골드에는 그런 욕심이 안드는데 희안하게 실버만 보면 그렇게 탐이 날 수가 없다

 

프랑스였나 이탈리아였나 아무튼 출장 때 머물렀던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중에 스테인레스로 된 조그만 주전자(아마 밀크팟이나 티팟이겠지?) 두 개를 서빙 받은 적이 있다. 블랙 커피와 따끈하게 데운 우유였는데 그 깜찍함에 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디자인도 디테일이랄 것도 없는 비주얼의 아주 평범한 스테인레스 이었는데 둘 다 깨끗하게 닦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반짝임은 새 물건이 주는 완벽한 깔끔함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반질반질 닳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건재한, 일종의 견고함와 이어지는 맥락의 반짝임이었다. 얘만 있으면 집에서도 호텔 조식 느낌을 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찾아나섰지만 그런 물건을 찾기는 의외로 쉽지 않았다. 업소가 아닌 이상, 보통 이런 물건을 돈주고 사지는 않기 때문일까? 아주 독특한 디자인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시장에 은근 있었지만 호텔 식당에서 만났던 평범하고 뻔한 물건은 없었다. 그렇게 손품과 발품을 팔다 결국 포기하게 됐다.

 

실제로 스테인레스로 된 식기를 집에 들이게 된 것은 아이 이유식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정확히는 식기가 아니라 편수냄비였다. 뭐가 됐든 간에 스테인레스 제품은 사용 전에 무조건 연마제 제거를 해줘야한다는 조언을 듣고 난생 처음 연마제 제거라는 일도 해보게 됐다. 이런 류의 물건들은 제작 과정에서 연마제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물질이 발암물질이라 반드시 이 부분을 닦아 내야 한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키친타올에 기름을 묻혀서 냄비를 닦아보니 정말 눈에 보이지 않던 시커먼 뭔가가 묻어나온다. ‘이 날 이 때까지 내 손으로 연마제를 닦아낸 기억이 없는데, 그럼 이 시커먼 물질을 다 내가 먹어없앴다는거야?’ 까지 생각이 닿자 뒤늦게 어이가 없다. 모르면 몰랐지 알게된 이상 사활을 걸고 깨끗하게 닦을 수 밖에 없다. 냄비에 묻은 기름을 주방세제로 씻어낸 후 베이킹 소다를 탄 물을 냄비에 가득 담아 펄펄 끓여 버린다. 다음은 구연산을 탄 물로 똑같이 한다. 이렇게 하면 1회 세척 완료. 키친타올에 기름을 묻혀서 냄비를 다시 닦아본다. 처음보다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시커멓다. 시커먼 것이 묻어나오지 않을 때까지 몇번이고 이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연마제 제거다. 어렵지는 않다. 아주 지리한 작업이라는 것만 빼면. 보통은 세네번 정도 반복하면 끝이 난다. 소비자에게 이렇게나 힘든 일을 시키다니, 애당초 연마제를 다 닦아내고 출하하면 되는거 아닐까 싶지만 관련 규정이나 규제가 없어 생산자가 그렇게 수고스러운 행위를 할 이유도 없고, 또 어느 정도 연마제가 묻어있어야 광택이 더 좋아보이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아마 오프라인에서는 그래야 더 잘 팔리기도 할테니까. 그렇다면 어차피 뭔가를 사면 한 번은 닦고 사용할테니 연마제도 첫 설거지 때 주방 세제만으로 편하게 닦인다면 좋을텐데, 그런 연마제는 없는걸까? 아마 없으니 다들 이런 품을 들이고 있겠지만.

 

연마제를 닦아내는 일이 너무 성가시다보니 덩달아 내 스뎅병도 약간은 식었다. 스뎅의 실체를 알게됐달까대신 요즘은 직접적으로 입이 닿지 않는 부분에만 스뎅으로 장식을 한 애들에 눈길이 간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코지타 벨리니 같은 류다. 하지만 가격도 끔찍할 정도로 비싸고 그 비싼 와중에도 몇 달을 기다려야 겨우 살 수 있다고 하니 이래저래 구매욕구가 사라진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애당초 이 소재 자체의 가격대가 높기도 하고 수요는 많지만 공급은 원활하지 않고..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한다. 심지어 카피 제품을 만드는 것조차 쉽지않다고 하니 기약은 더더욱 없다.

 

최근에 내가 그리도 찾아 헤매던 뻔하고 평범한 모습의 스테인레스 미니 티팟을 구했다. 아마 이제는 나같은 니즈를 가진 소비자가 늘어났고 이런 뻔한 물건도 상품성이 있다고 재평가를 받은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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