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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23. 2023

빙열과 함께 봉인, 터키식 차이 세트

그 나라의 그릇에는 그 나라의 분위기 같은 것이 담겨있다고 믿기에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동네 그릇 가게를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끝끝내 이고 지고 귀국한다. 비단 그릇이 아니어도 여행이나 출장길에 만난 물건에 있어 다음이란 없고 후회만 있기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쟁이는 것이 심신에 이롭다. 한국에 돌아와 똑같은 물건이 있는지 밤낮없이 이베이를 뒤지고 어마어마한 해외 배송료를 물 바에야 이 쪽이 훨씬 낫다. 가끔 이용자의 동선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배려한 것 같지 않은 공항에서 ‘그냥 버리고 갈까 하며 현타가 올 때도 있지만 그런 괴로움은 일단 귀국만 하고 나면 금방 잊힌다. 괴로움은 짧고 만족감은 길다. 그 괴로움조차 추억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컬러와 무늬의 폴란드 그릇이 한국에서 한때 유행했었다. 터키쪽 그릇은 이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또 다른데 그 화려함에 있어 내 취향은 폴란드보다는 터키 쪽이다. 그 화려함에 매료된 나는 이스탄불에서부터 차이단륵이라고 부르는 터키식 티팟과 찻잔, 그리고 커피잔 세트를 짊어지고 오며 진심으로 울뻔 했다. 심지어 비행기도 한번 놓쳐서 그걸 들고 공항에 왔다갔다를 두번이나 했다.

 

차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나라는 많지만 터키식 홍차인 ‘차이’는 터키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잘 만날 수 없고, 티팟도 찻잔도 생소한 형상이라 몹시 이국적이다. 이런 쪽에 욕심이 있다면 분명 짊어지고 올 결심을 하게끔 생겼다. 차이단륵은 쉽게 말해 2단 티팟인데 위쪽의 작은 티팟에 찻잎을 넣고 아랫쪽의 큰 티팟에 물을 넣고 끓이는 식으로 사용한다. 아래에서 물이 끓으면서 위쪽의 찻잎이 슬쩍 쪄지는 듯한 상황이 되는데 이후 아래 티팟의 뜨거운 물을 위 티팟에 부어 차를 우린다. 이렇게 우려낸 차이는 터키식 찻잔에 따라마시는데 찻잔 특유의 유려한 곡선은 분명 튤립의 형상이다. 이는 터키의 국화가 튤립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차이를 마실 때 찻잎이 입 속으로 덜 딸려오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한다. 차이 잔은 보통 유리나 도자기로 되어있어 갓 우린 차이를 부으면 엄청 뜨거워지는데 이 동네는 ‘뜨거운 것을 잘 만져야 진짜 남자라는 인식이 있어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 뜨거운걸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들고 마신다. 물론 너무 뜨거우니 중간중간 찻잔 받침에 내려놓아야 해 받침은 필수지만.

 

이슬람 문화권 특유의 알록달록한 색상과 무늬가 돋보이는 그릇들이 가득했던 시장통의 한 그릇 가게에서 숙고 끝에 짊어지고 온 티팟과 찻잔으로 그간 혼자만의 차이 타임을 종종 즐겨왔는데 어느 순간 찻잔 안 쪽에 심각하다 싶을 정도로 빙열이 생겼다. 그것도 하나만 그런게 아니라 세트가 전부 다!

 

빙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빙열은 우리가 흔히 빈티지 제품의 컨디션을 논할 때 언급되는 칩(이빠짐)이나 크랙(도자기 자체가 금 감)과는 다른 것이다. 빙열은 도자기의 유약 부분에 금이 간 것인데 유약이 갈라진 틈에 찻물이 스며들며 박테리아, 세균 등이 번식할 수 있어 비위생적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고, 찻잔이 노화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빙열 사이사이에 찻물이 든 찻잔을 지저분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다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점은 세월이 흐르며 사람에게 주름이 생기듯 찻잔에도 빙열이 생긴다는 점. 그리고 빙열이 생겼다 해도 당장 찻잔 자체가 박살이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 사용을 계속할지, 장식용으로만 둘지, 아니면 아예 처분을 해버릴지를 오롯이 내가 선택해야한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빙열이 비위생적이라면 얼마나 비위생적일까, 그렇다면 내 집 주방은 과연 위생적인가 생각하지만 거미줄처럼 자글자글하게 금이 간 모양새가 시각적으로 좀 징그러워서 결국은 그릇장 깊은 곳에 넣고 봉인을 해버렸다.

 

찻잔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차이단륵에도, 차이 자체에도 흥미가 식어 한동안 터키식 티타임을 잊고 살다가 최근 국내에 정식으로 유통되는 터키식 유리 찻잔이 우연찮게 눈에 띄어 얘를 구매하고 다시금 상을 차려봤다. 여전히 좋군 하는 감상. 터키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도 오랜만에 연락을 한번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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