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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Mar 24. 2023

내 취향 밖의 세계, 르쿠르제 접시

기본적으로 그릇은 깔끔하고 차분한 것이 좋다. 무엇을 담아도 어울리고 담긴 것을 더 돋보이게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심플하면서도 기품있는 느낌을 선호하지만 이 둘이 공존하는 영역은 정말 고급스러운고차원의 영역이다보통은 심플하면 심심하고심심하다 못해 지루하고지루함을 넘어 무성의해보이기가 쉽기 마련이라 이런 물건을 만나기가 쉽지는 않다. 심심함과 심플함은 깻잎 한 장 차이여서 같은 물건을 보고도 누군가는 심심하고 재미 없다 하고 누군가는 심플하고 고급스럽다고 느낀다. 그 깻잎은 사람마다 달라서 세상에는 그릇이 많기도 많다. 세상에 그릇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 중에 니 맘에 드는게 과연 단 하나도 없을까? 니가 뭘 좋아할지 몰라 전부 다 준비해봤어, 하는 느낌이다. 도리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중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깻잎을 찾기까지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꽤 써야 한다. 이 깻잎도 괜찮아 보이고 저 깻잎도 보다보니 마음에 들고.. 그렇게 고생 끝에 겨우겨우 내 깻잎을 찾아도 살다보면 내 취향이 변하기도 한다. 분명 마음에 쏙 들었었는데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 이제와서 별로인 듯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그래도 가끔은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허여멀건한 접시를 테이블 위에 주르륵 늘어놓으며 “하얀색이라고 다 같은 하얀색이 아니야, 하늘 아래 같은 화이트란 건 없어!” 해봐야 어쩔 수 없는 하얀 접시다. 그 와중에 색이 있어봐야 은은한 미색이나 옥색 정도다. 조금 둔한 사람이 본다면 분명 “이건 다 똑같잖아!”라고 하고 말테지. 

 

어느 날은 출판사 대표님에게 강렬한 컬러의 르쿠르제 대 접시를 두 장 선물 받았다. 르쿠르제란 특유의 색감과 두툼한 그립감, 그리고 그에 걸맞는 육중한 무게감으로 대표되는 녀석이기에 내 의지로는 절대 우리 집에 들어올 올 일이 없는 녀석이다. 셋 중 그 무엇 하나도 내 취향이 아니다. 그 중 르쿠르제의 색감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르쿠르제의 정체성이나 진배 없다. 쨍한 것도 아니면서 탁하거나 파스텔스럽지도 않고 말 그대로 정직하다. 빨강에도 벽돌색을 한 방울 탄 것 같은 빨강이 있고 다홍스러운 빨강도 있고 채도를 한 톤 낮추거나 높인 빨강도 있을 수 있는데 르쿠르제의 빨강은 진짜 그냥 순수한 빨강이다. 우리가 빨강이라고 하면 곧바로 떠올릴 바로 그 빨강이 르쿠르제의 빨강이고 르쿠르제는 이런 색감을 내는데 능하다그러면서도 야하다거나 유치하다거나 촌스럽지 않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참 대단한 물건이다. 

 

어쨌거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르쿠르제의 정직한 주황과 정직한 연두 접시가 한 장씩 생겼다. 반으로 가른 베이글 위에 크림 소스를 살짝 바른 후 루꼴라와 훈제 연어를 올리고 아보카도까지 썰어올린 오픈 샌드위치를 만들어 연두 접시에 담아봤더니 꽤나 산뜻하다. 아보카도와 깔맞춤을 한 것 같다며 주위 반응도 무척 좋았다. ‘우리 집 주방에도 강렬한 색감의 무언가가 생겼군!’ 싶어 금새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었다. 깨끗이 씻어 접시 꽂이에 올려보니 흰 접시들 사이에서 역시 독보적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요란 뻑적지근하게 주방이 알록달록해지는 것을 원치는 않으니 이런 컬러의 식기를 내 손으로 더 늘릴 일은 당분간 없겠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릇이란 본래 호불호를 심하게 타는 물건인데, 가끔은 내 취향과 거리가 있다고 느꼈던 물건이 의외로 괜찮을 때도 있다는 점이 새삼 놀랍다. 어찌보면 취향이라는 것은 일종의 감옥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이 감옥은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온라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감옥은 수많은 물건들 사이에서 어느새 내 취향에 맞는, 그리하여 비슷비슷할 수 밖에 없는 물건들만 골라내어 나에게 매일같이 보여준다. 알고리즘 안에서 벌어지는 선택은 대개 안전하다. 때때로 실패를 할 수도 있지만 크게 실패할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성공을 해도 크게 성공할 일이 없다. 


 하지만 안정권 안에서의 선택은 의외의 것이 주는 신선함, 새로움에 기반한 즐거움을 원천 차단하기도 한다. 집 앞 카페에서 생전 처음 듣는 노래가 단번에 좋아졌을 때, 평소의 나라면 펼쳐보지 않았을 작기의 책을 뭔가에 홀린 양 훑어보고 순식간에 그 작가의 팬이 되었을 때, 그 때 그 마네킹에 걸려있지 않았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을 그 가디건을 입어보았는데 찰떡같이 잘 어울릴 때, 우연히 버스 옆자리에 앉았던 이의 빨간 구두가 유독 예뻐보일 때, ‘세상에 이런게 있었어? 그동안 나만 몰랐니?’하며 나의 작은 세계는 깨어진다. 이는 모두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한다. 감옥 바깥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다. 감옥 바깥에 더 넓고 매혹적인 세상이 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은 역시나 사람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예상치 못했던 접시 두 장을 통해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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