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예 Mar 28. 2023

남겨진 물건, 로얄 알버트 레이디 칼라일

빈티지의 매력이자 맹점은 이전 주인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기를 어렵다는 것이다. 상태가 좋은 물건은 그럴 가능성이 낮긴 한데 그렇지 못한 물건의 경우는 험하게, 더 나아가 지저분하게 썼을 가능성도 있다. 코쟁이들이 어디에 어떻게 썼을지도 모를 물건을, 심지어 쓰다 버린 물건을 비싼 값에 사서 좋다고 쓰냐는 비아냥거림을 맘편히 흘려버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집에 있는 로얄 알버트의 레이디 칼라일 세트는 출처가 명확하다. 할머니가 사서 쓰던 애들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을 정리할 때 살뜰히 챙겨나왔다.

 

할머니는 옛날 사람답지 않게 꽤나 모던한 면이 있었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외제 그릇과 도자기 인형, 장식품 같은 것을 모으는 분이었다. 레이디 칼라일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레이디 칼라일은 화사하고 화려한 핑크톤과 금장 장식이 돋보이는, 대놓고 예쁜 물건이다. 대놓고 예쁜 애들은 쉬이 질리게 마련인데 그렇지 않다는게 바로 레이디 칼라일의 매력. 이 물건은 1940년대부터 생산되다가 이후 단종되었는데 워낙 인기가 많아 최근 다시 나오고 있다. 때문에 구하려고만 하면 지금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는 애인데, 차이가 있다면 최근 다시 나오는 애들은 인도네시아에서 oem 형태로 만드는 애들이라는 점이다. 단종 이전 물건들이 진짜 영국 물건인데 이 물건들은 현재 빈티지로만 구할 수 있다. 레이디 칼라일은 일반적인 찻잔보다 사이즈가 약간 작은데 장식적인 요소가 워낙 화려해 작은 사이즈임에도 매우 풍성한 느낌을 준다. 잔의 모양이 라운드 팔각형태이고 림 부분은 두껍지 않아 입에 닿는 느낌 또한 괜찮다.

 

내 할머니는 “할머니”라 하면 흔히 연상되는 자상함, 자애로움, 따뜻함 같은 것과는 기질적으로 거리가 있는 분이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족이었을 뿐, 사랑으로 묶인 끈끈한 관계 같은 것은 딱히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에 관한 애틋한 추억 같은 것도 그닥 없다. 미국을 다녀오며 선물로 딱 한번 꽤나 그럴싸한 폴리 포켓 세트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기억이 거의 유일한 좋은 기억이다

 

그렇다고 아주 악독하고 못된 마귀할멈같은 그런 할머니였다는 의미는 아니다그보다는 서로 데면데면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그저 고급스런 커피잔에 맥스웰하우스의 분말 커피를 쏟아붓고 휘휘 저어 나름의 무드를 즐기는 그런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맥심이 아니라 맥스웰하우스였고 거기에는 커피는 역시 미제라는 그런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레이디 칼라일 중에는 찻잔 세트와 함께 귀달이 접시도 있었어서 여기에는 미제 버터쿠키 같은 것이 올라갔다. 

 

어느 날은 커피 테이블에서 왼손을 쓴다고 손등을 후려맞았던 기억이 난다. 미제 커피와 쿠키를 즐기고 영국제 커피잔과 접시를 쓰는 신여성이었음에도 당신 눈 앞의 왼손잡이는 감히 용납이 안됐던 것이다. 더 살아보니 한국에서 왼손잡이로 산다는 것이 녹록치는 않아 나는 지금은 거의 오른손잡이로 살고 있다. 어쩌다보니 할머니의 바람대로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재미있는 것은 내 주변의 남자들이 거의 왼손잡이라는 점이다. ‘오른손잡이는 걸러!’ 하고 인간관계를 맺은 것이 아님에도 그렇다. 일단 아빠가 그렇고 남편이 그렇다. 직장에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동료들과 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오는 친구들 중에도 왼손잡이가 유독 많다. 내가 내 맘대로 왼손을 쓰지 못했기 때문인지 나는 어느덧 왼손잡이 콜렉터가 되어버렸다. 내가 낳은 내 자식도 왼손잡이다. 얘는 심지어 왼발잡이이기까지 하다.

 

레이디 칼라일을 볼 때면 종종 생각한다. 사람은 가도 물건은 남는다고. 내가 간 뒤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그 기억을 촉발할 물건은 어떤 것일까도 더불어 생각한다. 그 와중에 여전히 레이디 칼라일은 예쁘고 또 예쁘다. 많은 상념들은 피어오르는 밀크티의 향기와 함께 사라져간다.

이전 08화 나만의 엑스칼리버, 빨간 감자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