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미식가 앙텔름 브리야사바랭이 한 말이다. 이 말은 본래 그 사람이 먹은 음식을 통해 그 사람의 신분이나 경제력을 알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당신의 그릇장을 보여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그릇장이 고급 브랜드의 값비싼 그릇으로 꽉찬 사람은 부자일 것이다, 하는 뻔한 소리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를테면 이런거다. 일단 내 그릇장 속 모든 찻잔 세트는 모두 2조씩이다. 빈티지여서 2조를 끝내 구하지 못한 것은 1조짜리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2조다. 우리 집은 아주 오랫동안 2인 가족이었다. 그리고 남편 또한 나 못지 않게 커피와 차를 즐기는 사람이다보니 잔을 살 때는 항상 남편 것도 같이 샀다. 나는, 우리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딱히 내 취향도 아니면서 무려 6인 세트인 애들이 있다. 좁아 터진 그릇장에서 꽤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녀석들은 바로 레녹스의 버터플라이 메도우다. 찻잔에 머그잔에 대접시와 케이크 한 판은 너끈히 올라갈 커다란 굽접시까지 끼어있다. 얘들은 내가 독립할 때 엄마가 선물로 사준 애들이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꺼내놓을게 있어야지 하는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엄마는 쇼핑의 대부분을 홈쇼핑으로 해결하는 사람이고 홈쇼핑은 단품을 취급하지 않으니 이 엄청난 규모의 세트는 홈쇼핑에서 만날 수 있는 물건의 한계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도 남편도 성향상 집으로 사람을 들이는 일은 거의 없다. 아이가 갓난쟁이이고 동시에 펜데믹이던 그 시절에 아주 친한 친구들을 집으로 부른 적은 두어번 있지만 그래봐야 최대가 두 명이었고 그 때도 이 세트를 꺼낸 적은 없다. 일단 내 취향이 아니다. 레녹스가 워낙 유명한 브랜드이고 버터플라이 메도우 또한 그릇에 문외한인 사람조차 이거 본 적 있어! 할법한 유명한 녀석이지만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은 아니다. 때문에 ’좋은 걸 알아보지도 못한다’는 엄마의 타박은 10년이 지나도 여전하다.
참고로 레녹스의 모든 라인이 다 내 취향이 아닌 것은 아니다. 검색창에 “레녹스 빈티지”라고 검색해서 나오는 애들은 대개 호들갑을 떨 만큼 예쁘다. 그리고 꼭 빈티지가 아니어도 나는 레녹스 특유의 크림빛 색감과 두툼하게 두른 금빛 림 장식을 무척 좋아해 이런 특성을 잘 살린 홀리데이라인 등은 예뻐해줄 용의가 있다. 그런데 버터플라이 메도우는 일단 크림색이 아니다. 수채화를 닮은 맑은 하얀 바탕에 투명한 파스텔톤으로 꽃과 풀 등이 그려져있고 여기에 꿀벌이나 무당벌레, 나비 등이 함께 있는 디자인이다. 아무리 다시봐도 진짜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림의 두께가 내 입에는 맞지 않다. 두꺼운 것도 아니면서 또 얇은 것도 아닌게 무척 애매해서인지 일단 내 입에는 닿는 느낌이 그닥 좋지 않다.
그럼에도 이 세트를 처분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엄마 본인에게 꺼내주면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좋아하신다. 6인 세트를 한꺼번에 꺼내어 쓸 만큼 다수의 손님이 오는 일은 없지만 어쨌거나 시부모님이나 그 누군가에게 차를 내어드릴 때 얘를 꺼내면 너무들 좋아하신다. 아라비아핀란드의 키르시카를 꺼낼 때와 얘를 꺼낼 때 리액션 자체가 다르다. 전자의 경우는 ‘귀엽네’ 정도지만 후자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난다. 똑같은 걸 마시더라도 이런데 마셔야 대접받는 느낌이 드는거야, 라는 엄마의 의견이 유효한 때가 있는 것이다. 이 잔 하나로 그 날 테이블의 온도와 분위기가 달라진다. 사실 내 그릇장 안에는 이 시리즈보다 더 귀하고 더 비싼 애들도 제법 있지만 어르신들은 알아주지않는다. 어르신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애는 언제나 바로 얘다. 레녹스에는 언제나 백악관 식기,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사용한 식기라는 설명이 따라붙는데 이 부분이 어르신들을 매료시키는 지점이 아닌가 싶기는 하다.
그 와중에 이 물건이 재미있는 것은 무당벌레가 아주 리얼하게 그려져있어 벌레가 있네, 하고 잡으려하다 어머 무늬였잖아? 하고 깔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미국인들의 휴머(유머 아님)를 느끼곤 한다. 어르신들을 웃게할 소재가 주위에 많지 않은데 그 역할을 내 스타일이 아닌 무당벌레 한 마리가 해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버터플라이 메도우는 여전히 영 내 취향이 아닌 물건이지만 필요한 때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며 내 옆자리를 든든히 지켜준다. 아무리 내 세상이라 할 지언정 세상은 내 취향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한번 더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