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한 사람이 독립적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 나는 이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말을 내가 산 옷을 입고 내가 산 집(꼭 자가를 소유해야 한다고 말하는건 아니다)에 살면서 내 손으로 음식을 해먹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나는 특히 내가 한 음식을 내가 산 그릇에 담는다는데에 의의를 뒀다. 식생활에는 단순히 음식 이상의 의미가 있다. 먹을 때 필요한 식기와 커트러리 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식생활이다.
물론 그릇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내 주위만 봐도 그릇장이 아예 없다는 집도 있고, 워낙 잘 깨트려서 그때그때 적당히 사서 쓴다는 집도 있다. 집에서 뭘 먹질 않아 그릇이 아예 필요 없다는 경우도 있지만 배달음식이나 편의점 도시락 등이 주식이라 할 지언정 그것들을 덜어먹을 작은 앞접시나 라면을 먹을 때 필요한 젓가락 정도는 있다.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만약 그조차도 모두 일회용품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물컵은 몇 개 있겠지 생각한다. 그릇이 아예 없는 집이라는 건 임시거처가 아닌 한에야, 있을 수가 없다.
아무튼 간에 나는 내가 산 그릇에 내가 한 음식을 담아먹는다는 것이야말로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첫 발걸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첫번째 그릇을 고를 때 더더욱 신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젠의 레이첼 바커 시리즈다. 무늬 없는 하얀 접시들을 제외하면 우리집 식기의 기본은 이 라인이다. 백색과 남색으로 대표되고 유행을 타지 않는다. 평범한 만큼 이래저래 무난하게 여기저기 쓰기 쉬운 녀석이다. 이 그릇들을 들일 때 다른 살림살이도 대거 구매해야했고 여러가지 신경쓸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릇 하나하나를 단품으로 골라 사지는 못했고 4인 홈세트였나 하는 이름의 세트로 왕창 들였다. 10년이 다되가는 지금도 여전히 4인 가족은 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4인 가족은 될 일이 없을 걸로 결정이 된데다가 중간중간 깨트리며 3인 홈세트 정도로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든다. 사는 모습이 달라지며 이제는 국이나 찌개를 먹는 경우가 거의 없는지라 국그릇을 개인 샐러드 볼로 사용하고 베이킹을 하게되면서 밥그릇은 달걀을 깨서 푼다거나, 버터의 무게를 잰다거나 할 때 작은 볼 대신 사용하는 일이 잦아졌다. 종지용 접시는 고양이 간식 그릇이 됐다. 그렇게 막 써도 찰떡같이 제 역할을 해주니 참으로 용하다. 오랜 기간 매일같이 사용하다보니 하나 둘 깨먹기도 했는데 굳이 다시 채워넣지는 않았다. 이 상태대로 앞으로 10년은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취향만큼이나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유행이다. 그릇에도 확실히 유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자꾸만 요즘 유행하는 것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릇은 한철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매번 그 유행을 따르다보면 그릇장 폭발은 시간 문제다. 더 최악인 것은 수많은 그릇의 홍수 속에서 ‘전부 다 한물 간 것들이네, 쓸게 없다’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분은 주로 과포화 상태인 옷장을 앞에 두고 느끼는 기분이지만 그릇장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극단적으로는 내 그릇장이 그릇 무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때문에 오랜 기간 지치지 않고 쓸 수 있는 스타일로 기본 라인을 갖추고 가끔씩 특별한 아이들을 꺼내 기분 전환을 해주는게 좋다. 오랜 기간 쓸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비주얼만의 문제는 아니다. 무난한 비주얼은 기본이고 거기에 적당한 무게감, 전자레인지나 식기세척기에 마구 돌려도 끄떡 없을 것, 아무 세제, 수세미나 쓸 수 있고 생활 속 충격 등에 에지간히 튼튼할 것 등도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그릇은 보여지는 것보다는 진짜 생활에 더 닿아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진짜 생활은 휴대폰으로 보여지는 그 앵글의 바깥에 있다. 인생을 한 장의 사진에 담겠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식생활 또한 마찬가지다. 산해진미를 쓸어담고 비싼 접시들을 늘어놓은 화려한 플레이팅만이 그 사람의 식생활 전부는 아니다. 나 역시도 레이첼 바커를 주로 꺼내쓰는 보통 날은 사진으로 거의 남기지 않는다. 정성스레 카메라를 들이댈 말큼 특별할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날이 있기에, 아니, 그런 날이 더 많기에 특별한 날이 더 빛나는거라는 생각만큼은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군가의 생활을 묵묵히 함께 해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게 꼭 그릇이 아니라 해도 그런 무언가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일상은 조금 더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