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차를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마시는 것은 다 좋아한다. 여기엔 술도 포함이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엄마는 앞서 이야기했던 레녹스 버터플라이 메도우 6인 세트와 함께 와인잔 6개 세트도 사줬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하나는 깨트려 지금은 5개만 남아있는데 어차피 이 중에서 사용하는 것은 2개 뿐이다. 나머지 3개는 바닥의 스티커도 떼지 않았다. 낡은 새 물건인 셈이다.
와인잔도 은근 생김새가 다양한데 우리집에 있는 녀석들은 보울 부분이 유독 동그랗고 큼지막한 녀석들이다. 엄마는 옛날 사람이라 와인을 잘 모르고 나는 옛날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와인을 잘 모른다.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와인잔에 대해 잘 알 턱이 없다. 엄마는 매장 직원이 추천하는대로 아마 가장 무난하고 대중적인 물건을 골랐을거고 나도 이게 뭔지 제대로 확인도 않고 덥석 받았다. 받고나서 보니 즈위젤 글라스의 쇼트즈위젤이다. 쇼트즈위젤 안에도 여러 라인이 있고, 그 라인 안에서도 레드와인 용이니 화이트 와인 용이니 샴페인 용이니 하며 다양한데, 이건 아마도 ‘보르도’ 인 것 같다. 어찌됐건 아주 잘 쓰고있다.
이 잔의 특징은 무난하다는 것이다. 림의 두께도 스템도 베이스도 모두모두 무난하고 평범하다. 무난하고 평범한 요소들이 한데 모여 찰떡같은 물건이 됐다. 모든 면에 있어 무난하고 평범하다는 것은 바뀌 말하면 단점이 없다는, 완벽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주 특출나고 뾰족한 장점은 없을지 몰라도 딱히 흠잡을 데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격적으로도 완벽하다. 짠!을 했을 때 “첑”과 “챵”하는 소리의 중간 정도 느낌으로 맑은 소리가 나는 것도 좋다. 가끔 “틱”하는 소리가 나는 와인잔들이 있는데 이건 정말 못참겠다.
예민한 미각과 후각을 지닌 사람들은 와인에 맞게 잔도 달리쓴다고 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 와인잔 하나로 뭐가됐든 주구장창 잘도 마신다. 와인잔의 중요성을 실감해보려면 똑같은 와인을 종이컵에 마셔보고, 와인잔에도 마셔보라고들 한다. 종이컵은 특유의 냄새가 있으니 나도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겠지만 나의 감각이란 딱 거기까지다. 레드와인 잔에 화이트와인을 마시거나 혹은 그 반대로 해도 그 차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할게 뻔하다. 내게는 일단 <신의 물방울>의 누군가처럼 혓바닥이 춤을 추고 갑자기 귓가에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들리는 그런 류의 감각이 전혀 없다. ‘붉은 과일과 초콜렛, 스모키한 느낌이 한데 어우러진다’ 하는 테이스팅 노트를 보면서 마셔도 ‘초콜렛이 어디..? 평생 초콜렛을 안먹어보셨나..?’ 하는 기분만 든다. 여전히 내가 표현하는 맛은 달다, 떫다, 시다 하는 그런 1차원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다. 이런 감각은 대개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딱히 없다. 후천적으로 이런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그만큼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야 한단다. 그건 많이 마시면 점차 알게 된다는 것과도 같은 말일까? 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미 평생에 걸쳐 엄청나게 마셔왔지만 나는 여전히 와인을 잘 모른다. 와인에 있어 내 취향은 아예 포트 와인이나 셰리 와인이 아닌 한 스위트한 와인은 싫다, 특히 시중에 나와있는 화이트 와인의 대부분은, ‘스위트하지 않다’라 되어있는 애들조차 내 입에는 너무 달다, 하는 그 정도다.
감각이 둔하면 그 감각의 창을 통해 보이는 세계도 자연히 단순해질 수 밖에 없다. 내 세계에서 와인은 맛있는 와인과 맛없는 와인, 그 둘로 구분된다. 물론 맛있는 와인과 맛없는 와인 그 사이에 엄청난 스펙트럼이 있겠지만 나는 그것들을 명확히 캐치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대신 ‘맛있다’와 ‘맛없다’는 확실히 가려낼 수 있다. 와인에 있어서 만큼은 세상을 딱 절반으로 명쾌하게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힘은 때론 엄청난 강점이다. 누군가 “이 와인에서는 열대 과일과 감귤, 그리고 바닐라의 섬세한 아로마에 미네랄 터치가 함께 느껴져요” 라고 해도 쉬이 쫄지 않게 된다. 나는 ‘내가 잘 몰라서 못느끼는 거겠지? 역시 난 안되나 봐’보다는 ‘뭔소리야! 내 입에는 시큼하기만 한데. 별로잖아!’가 가능한 사람이 되고싶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되기도 했다.
“니가 너무 예민한건 아닐까? 내가 보기엔 너도 좀 문제 있어” 하는 류의 가스라이팅을 지난 10년간 늘어놓더니 이제와선 “예민한 사람만이 가진 강점이 있지” 하는 소리를 슬금슬금 해댄다. 언제나 말은 쉽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며 합심하여 강제로 모난 부분을 열심히 깎아놓더니 이젠 엣지가 없어 못쓰겠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오늘도 한 잔 마셔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