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
문학의 주는 대부분의 즐거움은 짱짱한 스토리에서 온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에 이르는 다섯 단계의 흐름과 절정 부분에서 쏟아지는 카타르시스! 모든 떡밥은 회수되고 권선징악에 기반한 사이다 같은 결말까지! 어찌 후련하지 않겠는가. 드라마나 영화 등도 대개는 이런 구조를 따른다. 그런데 어째 드라마도 영화도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는 추세다. 오렌지 주스를 뿜고 김치로 싸대기를 후려치는건 이미 옛날 일로, 귀여울 정도다. 잔인한 장면의 수위는 눈 뜨고 못봐줄 만큼 높아진지 오래다. 하지만 이건 작가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보니까! 16부작짜리 드라마를 20분짜리 요약본으로 만들고, 그걸 또 20초짜리 쇼츠로 만들어보는 세상이니 직설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장면들로 채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항변도 공감은 간다. 사실 일회성으로 이런 컨텐츠들을 즐기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자극에 익숙해지다보면 점점 더 높은 자극을 원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뺨을 치는 것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 머리끄댕이를 잡아줬음 싶고 머리끄댕이로도 부족한 듯 싶으니 아예 바닥에 쓰러트리고 구둣발로 짓밟아줬으면 싶어진다. TV 속에서나마 누군가가 그렇게 얻어맞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니 내 속이 다 시원하다!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내 분노를 푸는 것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폭력물을 많이 보면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요!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진 않다. 그보다 나는 감정에 있어 역치가 한 번 올라가면 삶이 단조로워질 수 있다는 점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왠만한 것에는 재미와 흥미를 느끼지 못하니 매사가 재미없고 심심하고 무료하다. 남들이 감동이라고 하는 영화를 봐도 그닥 와닿지않고 지루하기만 하니 더 자극적인 것, 더 수위 높은 것만 찾게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개 미묘한 것들이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한 끝 차이에서 판가름이 나곤 하는데 감정의 역치가 높을 경우엔 이런 감정선을 제대로 캐치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문해력이 특히나 매력적인 이유는 이러한 감정의 역치를 낮춰준다는데에 있다. 문해력이란 텍스트로 쓰인, 시각적 자극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글자들 사이에서 아주 은근하게 표현된 무언가를 온전히 내 힘으로 찾게하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치가 다소 낮을 때는 재미난 스토리 라인에 기반한 글 위주로 읽을 수 밖에 없지만 어느 정도가 지난 후에는 재미만을 좇는 수준을 넘어 더 다양하고 더 넓고 더 풍부한 감정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좋다.
이런 연습은 줄거리 그 자체보다는 상황이나 분위기, 혹은 등장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가 주력인 이야기, 바꿔 말해 서사가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해볼 수 있다. 문해력을 렌즈라고 본다면, 렌즈의 배율을 좀 더 높여 이전보다 조금 더 작고 미묘한 의미를 찾는 일을 해보자는 것인데,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들이 이런 영역에 아주 좋다. 평범한 삶에서 비범한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평을 받는 단편소설의 거장 윌리엄 트레버의 이야기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바로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라는 이야기다. 일반적인 책 사이즈 기준으로 페이지도 10페이지가 채 안되어서 분량적인 부담도 없다.
미스 나이팅게일은 아버지가 물려준 집에서 간간히 피아노 레슨을 하며 나름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다. 어느날 천재성을 지닌 조용한 소년이 그녀를 찾아온다. 레슨 때마다 소년의 연주는 그녀를 황홀경으로 이끌고 그녀는 소년이 올 때마다 격하게 행복하다. 하지만 소년이 다녀갈 때마다 그녀의 자잘한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이내 당혹감에 빠진다.
이 이야기는 이후부터 조금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소년의 좀도둑질로 인해 견고했던 감정의 기반이 흔들리며 나이팅게일은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딸을 키워낸 헌신적이고 다정했던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을 평생 곁에 붙잡아두어 주저 앉힌 것은 아닌지, 자신과 16년간이나 밀회를 즐기며 아내와 헤어지고 돌아오겠다던 유부남이 사실은 그럴 마음도 없었으면서 그저 자신을 기만했던건 아닌지를 새삼스럽게 의심하며 불면의 밤에 시달린다. 갑자기..? 좀도둑질이랑 대체 뭔 상관..? 싶으면서도 때때로 삶이란 아주 작은 균열로 인해 무너지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더 이상 레슨을 오지 않게 되면서 그녀의 일상은 평온을 되찾는다. 그러던 어느 날, 훌쩍 커버린 소년이 돌아온다. 물론 소년은 훔쳐간 물건들을 돌려주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다. 사실 어린 시절에 탐냈었던 자잘한 물건 따위는 모두 잊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그저 피아노 앞에 앉아 예전처럼 그녀를 위해 연주한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그녀의 인정을 기다리며 미소를 짓는다.
이 이야기의 백미는 벌어진 일들과 등장 인물들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에 있다. 소년이 오지 않게 되면서 나이팅게일은 그 모든 것이 진실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리고 자신의 연인이 설령 의도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회상 속에서는 진실이 문제가 덜 된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그녀는 인간의 나약함과 탐욕이 예술이나 사랑처럼 완전 무결한 것들에 어떻게 흠집을 내는지를 바라보며 이해해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소년이 돌아와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을 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또 균형이 이루어지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점을 그녀는 새삼 깨닫고야 만다.
이 이야기는 시종일관 고요하고 차분하다. 좀도둑질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마음의 평화가 깨지지만 그 역시도 일시적인 것일 뿐 여전히 나이팅게일은 기품을 잃지 않는다. 지난 날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울분을 터트리는 대신,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나보낸다. 스펙타클한 사건과 입체적인 인물들의 향연, 그리고 소름돋는 반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밋밋하고 따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불완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삶 자체가, 그러한 아이러니 자체가 경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를 통해 우리 역시도 그것을 바꾸거나 거스를 권리가 없음을 은연중에 알게 한다.
감동이 한방에 와닿는 글이라기보단 잔향과도 같은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글이다. 이 글 속의 문장들은 하나같이 평이하고 담백한데, 그런 문장들 모두가 맥락상 적절한 위치에 놓여 있어 감동 포인트가 된다. 성실하게 차곡차곡 쌓인 문장들은 후루룩 읽고 치워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깝다. 다시금 앞장으로 돌아가 다시읽고 다시읽는 수고스러운 일이 어울리는 우아한 글이다. 서사가 명확하지 않아도 그 나름의 맛이 있다. 그 맛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면 좀 더 고난이도의 맥락 읽기를 통해 줄거리 바깥의, 조금 다른 계열의 재미를 맛보는데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우리의 문해력 또한 어느새 한 뼘 올라왔다고 봐도 좋겠다. 오늘은 축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