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을 읽는 일은 섬세하게 묘사된 삶의 단면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표정을 발견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수 많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녹록치 않은 삶을,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살아가다가 뜻밖의 반전을 마주하고 비로소 그에 감동한다. 우리의 삶이라고 무엇이 다르랴.
내가 여지껏 일곱 권의 책을 지은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읽기와 쓰기를 계속해왔다. 아주 오래전 얘기지만 대학에 진학할 때는 수 권의 "독서노트"를 제출했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한, 아주 똘똘한 학생(!)이었는데 공부만 잘했다 뿐, 특별한 활동이나 수상 등은 없었어서 덧붙일 자료가 이 독서노트 밖에 없었기도 했다. 이 노트는 누군가 나에게 작성을 강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스스로 재미로 썼던 것이었는데, 글을 쓰는 재미에 더불어 손글씨를 쓰는 재미(꽤 많은 사춘기 소녀들은 손글씨를 예쁘게 쓰고 꾸미는 것을 즐긴다)와 물리적으로 노트의 권수가 늘어나는 재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이 노트들이 과연 플러스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하던 대학의 원하던 학과에 무사히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 수능 언어영역은 그닥 어렵지 않게 만점을 받았다.
돌아보면 내 부모가 나의 문해력을 키워주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일단 그 시절에는 문해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책 육아라는 말도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연상되는 독후 활동 같은 것도 전혀 몰랐던 세대였다. 다만 '책 많이 읽으면 똑똑해져'라는 믿음에 기반해 책을 계속 제공해줬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모든 책을 다 살 수는 없는 형편이었어서 때로는 누가 버린 것을 주워오기도 했고 아는 사람을 통해 얻어오기도 했고 책 대여점에서 빌려다 주기도 했다. 뭐가 됐든 나에게 있어 책을 읽는다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이었어서 고3 시절에도 짬짬이 책을 읽었고, 대학에 가서도, 취업을 하고도, 아이를 낳고 케어하면서도 없는 시간을 쥐어짜는 한이 있더라도 뭔가를 계속 읽었다. 나의 문해력, 절대 지켜!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읽기를 지속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내게는 읽는 일이 너무 당연했다.
그 덕분인지 사실 나는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하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 문해력이 화두가 되었을 때도, 남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넘겨버렸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백신을 몇번 접종하고 나서, 소위 '난독증' 같은 증세가 난생 처음 나타났다.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글씨를 해독하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증세는 대략 일주일 정도 지속됐는데 그 동안은 책은 물론이고 간단한 업무용 이메일을 해석하는 것에도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했다.
일주일간 다시금 책 읽기를 배우는 심정으로 아주 쉽고 짧은 책부터 시작했다. 어차피 매일 아이의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어서 쉽고 짧은 문장에 대해서 소리내어 읽는 연습이 절로 되었고 이후 조금씩 책의 단계를 올렸다. 적절한 트레이닝과 함께 내 몸 컨디션이 회복되며 다행히도 일주일 만에 난독증은 사라졌다.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를 경험하고 보니 이런 상황과 느낌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구구절절 실감하게 되어 이런 글들을 쓰게 되었다고 하면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없던 사람은 그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할 것도 같다. 쉽게 말하고 쉽게 읽고 쉽게 쓰고도 그럭저럭 잘 살 수 있는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있다 없어본 입장에서는 그 심각성이 너무나도 와닿아서, 내가 가지고 있던 능력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문해력은 부익부 빈익빈이 많이 작용하는 영역이다. 일단 한번 읽는 재미를 느끼면 어떻게든 그 곁을 맴돌며 계속 그것을 움켜쥐려 하기 때문에 계속 읽게 되고 문해력 또한 계속 발달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 밖에 없다. 문해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읽기 싫은 글이어도 억지로 꾸역꾸역, 훈련하는 심정으로 읽어내야한다고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일단 재미가 있고 짤막해야 읽어내기가 쉽고 완독의 뿌듯함으로 읽기를 지속하기가 쉽다. 그래서 시작을 '단편 소설'로 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단편 소설을 택한 또 다른 이유를 꼽아보자면, 그건 역시 내가 단편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그래서 내가 잘 권할 수 있는 것들을 수단으로 선택했다.
나는 단편 소설이 우리의 일상과 가장 닮은 장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인생을 한 편의 영화에 비유하곤 하나, 명확한 사건과 끝이 있는 영화와 달리 인생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속하는 가운데 계속 이어진다. 때로는 사고에 가까운 아주 큰 사건, 때로는 사건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소소한 해프닝 같은 것들이 시시 때때로 발생한다. 때로는 그로 인해 충격을 받거나 뭔가를 깨닫거나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기도 한다. 물론 아무 타격없이 지나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사건이나 깨달음 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 삶의 본질은 뭐가 됐든 간에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너무 행복해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해도, 혹은 너무 괴로워서 전부 다 당장 끝장내버리고 싶더라도 내일은 반드시 온다. 때문에 인생은 영화보다는 드라마, 드라마 중에서도 시즌제 드라마에 더 가깝고 하나의 장편보다는 여러 단편을 연이어 읽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뭐가 됐든 단편 소설을 그럭저럭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면 장편 소설도 두려울 것이 없다. 사실 단편 소설은 상당 부분 시를 닮아있기도 해, 독자에게 있어서는 다소 불친절한 장르가 맞다. 그에 반해 장편 소설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쉽고 친절하게 느껴질 것이다. 장편 소설을 읽어낼 수 있다면 비문학도 가능하다. 비문학은 어떤 현상이나 이론을 설명하거나, 어떤 의견을 내보여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문장이 좀 더 간단하고 쉽다. 전문적인 용어나 개념이 다소 생소할 수 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글 자체는 거의 떠먹여주는 글에 가깝다.
나는 이 글들을 쓰면서 내내 생택쥐페리의 <야간비행> 속 주인공 라비에르의 말을 떠올렸다. 목표는 어쩌면 그 어떤 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행동만이 우리를 구원해준다는 라비에르의 말을. 인생에는 해결책이 없고 다만 추진력만이 있어서 그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고, 그러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는 라비에르의 말을 자꾸만 생각했다. 문해력이라는 목표를 의식적으로 좇기 때문이 아니라, 읽는 일을 계속하면 문해력은 뒤따라오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문해력을 목표로 삼아 억지로 읽어내는 대신,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읽는 재미를 알고 덩실덩실하며 절로 더 많이 읽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앞서 조심스레 권한 작품들이 그 일을 도와줄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 차주에 마지막 글로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