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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Jan 29. 2024

요약 대신 대표 문장을 만들자

앨리스 먼로, <곰이 산을 넘어오다>

문해력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글을 읽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재구성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고 활용하는 것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글쓰기, 작문 능력도 그 범위에 포함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많이 읽으면 잘 쓰게 된다는 믿음이 있는 것도 같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많이 읽기만 한다고 '저절로' 잘쓰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읽은 것을 내 것으로 체득하고 내 글로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자꾸 써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것을 어딘가 처박아두지 말고 누군가에게 자꾸 내보여야 한다. 제대로 코칭해줄 사람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나는 말로는 잘하는데 글로는 못쓰겠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주위에 꽤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말'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조금 횡설수설하더라도 청자의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리액션을 통해 이를 바로 잡을 기회가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청자가 '그러니까 니 말은 이러저러하다는거지?'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경우도 있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것을 문해력이라고 한다면, 문해력은 사실상 '청자'의 것이다. 화자 본인의 언변이나 논리 때문이 아니라 청자의 문해력 덕분에 도리어 화자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맥락 사회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하다. '고맥락 사회'란 의사소통에 있어 직접적인 방식보다 간접적, 그러니까 암묵적인 방식과 비언어적인 신호가 더 큰 포션을 차지하는 사회라는 뜻이다. 반대로 저맥락 사회는 명확한 의사소통, 명확한 단어와 문장에 기반해 소통한다. 고맥락 환경에서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캐치하고 소통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인데, 이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눈치라고 하고 사람과 글 사이에서는 문해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저맥락 사회의 사람들에 비해 우리는 기본적으로 행간을 읽고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촉이 더 예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간 고맥락 환경에 시달려온 경험치를 십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반대다. 백지는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즉각적인 피드백을 줄 수 없는 존재다. 쉽게 말해, 말은 눈치껏 할 수 있었다면 글은 대개 그럴 수 없단 얘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심지어 글을 자주 써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난감하고 막막할 수 밖에 없다.


책을 읽고 하는 '독후 활동' 중에서는 독후감, 요즘 말로는 책 리뷰를 쓰는 것이 대표적이다. 대개 리뷰는 내가 느낀 점 위주로 쓸 것을 권유받지만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치않다면 줄거리를 요약하는 활동 위주로 시작해도 좋다. 줄거리 요약이라고해서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기승전결을 육하원칙에 꼭 맞춰 담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작품에 따라서는 이런 식의 요약이 별 의미가 없을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줄거리 요약보다도 본문 중에서 대표문장을 꼽거나, 더 나아가 대표문장을 내가 스스로 만드는 활동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대표문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여러 문장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것도 어렵다면 인물의 성격, 혹은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만 정리해봐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이런 활동에 좋은 소재가 되어줄 작품들이 바로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이다. 먼로의 작품은 아주 기나 긴 장편 영화, 아니 어쩌면 남의 인생에서 10분 정도만 뚝 크롭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 10분이 심지어 클라이막스의 10분도 아니고 말 그대로 랜덤하게 필름의 중간 아무데서나 따온 느낌? 그래서 우리가 여지껏 익숙하게 해온 '기승전결' 형태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읽기에 난해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먼로의 작품은 대개 평범한 여성들이 주인공인데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기반으로 하는 와중에 그 평범한 일상에 아주 작은 균열이 가는 사건들이 생겨난다. 앞서 남의 인생에서 아무 10분이나 잘라낸 것 같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먼로의 이야기들은 아주 정교한 면이 있다. 다들 나름의 사연도 갖고 있다. 덕분에 공감이 아주 잘 된다. 먼로의 작품 속 여성들은 평범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고, 지루할 만큼 아무 것도 아닌 일상 속에서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데 특화된 인물들이다.


먼로의 작품 중 다수는 1950~60년대 캐나다의 모습을 그린 것들임에도, 여기에 표현된 사람들의 모습이나 사회적인 현상 같은 것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별 반 차이가 없다는 점도 우리가 먼로의 작품을 어렵지않게 읽을 수 있는 포인트 중 하나다. 마음대로 안되니까 비열한 술수를 쓰며 끝내 세입자를 내쫓는 건물주, 동네 집값을 위해 혼자 사는 노인의 허름한 집을 '합법적으로' 철거할 궁리를 하는 마을 사람들, 연애는 나랑 실컷하더니 결혼은 다른 여자랑 순식간에 해버리고 안면몰수하는 남자... 먼로가 지은 응축된 이야기 안에는 이런 부분들이 날카롭게 드러난다.


그렇다고 먼로의 단편이 죄다 이런 식으로 암울한 것은 아니다. 사랑, 혹은 우리가 사랑일것이라 착각하는 것, 어쩌면 우리가 사랑이라 믿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한 단편들의 경우는 확실히 대중성도, 재미도 있다. 실제로 영화화된 작품들도 몇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은 <Away from Her>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곰이 산을 넘어오다>이다.


그랜트는 치매에 걸린 아내 피오나를 요양소로 보낸다. 한달여의 적응 기간이 끝나고 피오나를 마주한 첫 면회. 그 사이 피오나는 그랜트를 완전히 잊고 요양소의 다른 환자 오브리와 사랑에 빠져있다. 그런데 오브리가 퇴원하고나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피오나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된다. 다른 남자와 절절한 사랑에 빠진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심정.. 보다못한 그랜트는 오브리의 아내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피오나가 오브리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오브리의 아내는 이를 거절하면서도 그랜트에게 여지를 남기며 은근한 추파를 던지고 그랜트는 흔들린다.


이렇게 요약하고 보니 왠지 다소 막장이 되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오브리의 아내와 그랜트는 썸을 탔을까? 피오나와 오브리는 다시 만났을까? 그랜트와 피오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온라인 상에 이런 사연을 올리면 대번에 "이혼하세요!" 같은 댓글이 달릴게 뻔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그렇게 단칼에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이야기는 제대로 된 치유 없이 상처 위로 켜켜히 세월만 쌓인 결혼 생활이란 대체 뭔지를 차분히 돌아보게 한다. 길지 않은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이 부부는 대체 그간 어떤 세월을 살아온건가 하며 그 일생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능력은 오롯이 먼로의 것임이 맞으나 그 형식은 반드시 단편이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의 여운은 단편이라는 형식에도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어째서 단편이 '모든 산문의 형식 중 가장 응축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장르'라고 평가받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한다. 물론 이 여운을 제대로 맛보려면 이면의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 이야기들을 모두 아울러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든다면 '공감과 소통 없이 세월만 쌓인 결혼 생활의 현실이 결국 치매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다'가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라는 작품도 아주 재미있다. 처음에는 뭐 이런 멋대가리 없는 제목이 다있어? 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는 여자의 이름과 남자의 이름을 써놓고 같은 철자를 지운 후 남은 글자수에 맞춰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차례로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세어나가는 일종의 놀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어나가다가 그 숫자에 걸리는 단어가 바로 그 둘 간의 운명이라는, 우리 식으로 하면 재미삼아 하는 이름 궁합 같은 놀이 말이다. 10대 소녀 새비서의 아빠 부드로는 일 때문에 혼자 먼 지역에 나가있다. 새비서와 새비서의 친구 이디스는 부드로에게 온 편지에 답장을 하면서 그 집 가정부 조해너의 이름으로 가짜 구애편지를 끼워넣는다. 편지를 받은 부드로는 조해너(가 썼다고 되어있지만 사실은 새비서와 이디스가 쓴)의 편지를 무시하지만 둘은 계속해서 조해너와 부드로 양쪽에 가짜 구애편지를 전한다. 보이스피싱 격인 이들의 장난은 이후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이상한 말을 지어내어 전하는 편지, 그리고 그 주인공들이 10대 소녀라는 점에서 얼핏 영화 <어톤먼트>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비극으로 끝나는 <어톤먼트>와 달리 이쪽은 아주 재미있는 결말을 맞는다.


벌써 10년이나 된 일이지만 앨리스 먼로는 2013년 당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존하는 최고의 단편 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말이다. 수상 직후 국내에도 먼로의 대표작이 여럿 출간되었었지만 그 시절의 나는 기승전결도 애매하고, 대체 이게 뭐지? 더 나아가 왜 상을 탄거지? 하는 느낌에 그닥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던게 사실이다. 나이를 더먹고 아이를 낳고 다시금 읽어보니 다시 읽어보니 그 때와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지금의 나는 삶에 있어 결론만이 중요한게 아님을 조금은 더 알게 되었었어서 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먼로의 작품을 권한다면, 그것은 이 이야기들을 읽고 문해력 너머까지의 무언가를 더 느낄 수 있었으면 해서 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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