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처음으로 머리를 잘랐다. 어디든 내가 단골로 이용하는 곳은 대개 장사가 잘 되는 것 같다. 조그만 동네 미용실이었던 이곳이 몇 년 새 사업장을 다섯 군데로 늘렸다. 가끔 보면 내가 손님을 몰고 오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는 자리에 앉아마자 단골 바의 바텐더에게 칵테일을 주문하듯, 전담 미용사에게 ‘늘 하던 대로’라고 얼버무린다. 나는 그들에게 까다롭지 않은 손님이지만, 한편으론 매번 염색 한 번 하는 일없이 커트만 하는 돈 안 되는 손님이다.
각설하고, 나는 머리가 빨리 자라는 편이다.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미용실에 간다.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 시절 공룡과 축구밖에 모르는 순진한 아이였다. 손톱, 발톱도 잘라놓으면 며칠 새 하얗게 뿌리를 밀고 올라온다. 키만 조금 더 자랐다면 좋으련만. 정작 자랐으면 하는 것은 자라지 않고, 공연히 귀찮게만 하고 있다. 머리숱도 많아서 다달이 가위를 댈 때마다 뭉텅뭉텅 하얀 가운을 검게 뒤덮는다(탈모인 천만 시대라는데, 그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런 면에서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매달 머리를 자르다 보니, 이제는 머리가 좀 안 자랐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돈도 돈이지만, 금세 덥수룩해지는 머리를 매번 왁스칠로 눌러대기도 곤혹스럽다. 전형적인 ‘흙손’인 나는 왁스를 바를 때마다 머리 모양이 달라지는 희한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머리가 자라면 자랄 수 록 더 다이내믹해진다. 미용실을 나서는 그 순간 그대로 멈추었으면, 그리고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다시 머리가 자랐으면. 사실 미용실 의자에 앉을 때마다 소원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사실 그건 내 신진대사가 멈추지 않는 한, 그러니까 내가 좀비라도 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가끔 내 의지로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꿈꿀 때가 있다. 남들이 듣기엔 다소 해괴할 수도, 혹은 남들도 한 번쯤은 다 해보는 생각일 수도 있다.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린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예전 겨울에 한창 다이어트를 했을 때는 배가 좀 안 고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패딩 안감까지 땀이 배도록 동네를 걸어 다녔는데, 늘 다니던 코스에 있던 치킨집은 나를 비웃듯 막 튀긴 치킨을 노란 불빛 아래 전시하고 있었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치킨집을 지나기 얼마 전부터 침을 꼴깍거리며 삼켰다. 매혹적인 치킨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으며, 내가 과거에 치킨들과 쌓았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 ‘사람은 도대체 왜 배가 고픈가’ 하는 당연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하곤 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그 치킨집의 존재를 알면서도 굳이 코스를 바꾸지는 않았다. 코를 강렬하게 스치는 그 냄새라도 훔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 없이 찾아오는 허기에 투덜대면서도, 운동하러 집을 나설 때마다 그 기름진 냄새를 기대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찬가지로 내가 번거로움을 감내하며, 꼬박꼬박 머리를 자르러 가는 이유는 말끔히 다듬어진 머리칼에서 느끼는 청량감 때문이다. 어수선한 머리칼을 솎아내는 가위의 사근 거리는 소리가 좋다. 꼭 내 마음에 낀 때라도 벗기는 느낌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엉뚱한 상상들을 단순히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온전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불편함의 해소를 바라며 그런 상상을 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화될 기회가 찾아온다면 주저할지도 모르겠다. 불편의 이면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쾌감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현상과 사물들은 우리에게 불만과 만족을 동시에 선사하는 것 같다. 매번 나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것은 없다고 느낀다. 무언가를 감내하는 대신, 또 다른 무언가를 얻는 것. 그것이 내가 살면서 체득해야 할 삶의 모순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