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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기린 Jun 08. 2024

괜찮다는 말 한마디

건강에 아주 걱정이 많은 동료가 있다. 정확히는 의사에 대한 불신이 크다. 

'이 병 아닌가? 아니면 이 병인가? 이 약을 먹을 때 이 과일을 먹어서 그런가?' 하면서 정작 의사 말보다는 인터넷 검색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그래서 결국 대학병원까지 가면서도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병원 의사가 말 해도 믿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당연히 의사가 약 부작용을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병원에 다녀온 그녀가 단단히 성이 난 목소리로 나에게 토로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그 약은 이러이러한 부작용이 있다는데 하면서 의사에게 계속 따지고 드니 의사가 다른 병원 가보라고 했다면서 한탄을 했다. 모든 약엔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영양제도 과다복용하면 부작용이 있고, 음식도 탈이 나는 음식이 있다. 의사가 대표적인 부작용을 알겠지만, 설명서에 깨알같이 쓰여 있는 모든 부작용을 다 꿰고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 나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본인이 생각한 답을 아무도 말해주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20대 후반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왼쪽 맨 아래 갈비뼈를 쭉 따라 차가운 팩을 올려놓은 것 같이 차가운 느낌과 함께 멍이 들었을 때 같은 통증이 느껴졌는데 그 낯선 느낌은 일주일이 넘게 나아지지 않았다. 엄청나게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신경이 쓰이니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병원을 가자니 뼈가 아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나 장이 아픈 것도 아니라서 어떤 병원을 가야 할지도 애매했다. 고심 끝에 신경외과를 가보기로 했다. 


퇴근을 하고 서둘러 병원에 갔다. 의사에게 증상을 이야기 하니 조영제를 맞고 신경 CT를 찍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지금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다음에 다시 방문하길 권했다. 혼자 그런 검사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 겁이 났다.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병원을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빨리 고향에 내려가 엄마와 병원 투어에 나섰다. 일단 동네 내과를 가보았다. 의사는 내 설명을 제대로 듣는 것 같지도 않아 믿음이 가질 않았다. 차라리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이야기에 엄마와 함께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접수하면서 증상을 이야기 하니 관련 과로 안내해 줬는데 지금은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대기 의자에 앉아서 어떻게 하면 내 증상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머릿속에 되뇌고 또 되뇌었다. 드디어 내 이름을 불렀고, 엄마와 함께 진찰실에 들어섰다.


나는 인사를 하고 동그란 의자에 앉자마자 증상이 어떤 느낌인지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생겼는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려고 심사숙고해서 설명했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안경을 쓰고 마르고 까칠한 인상의 의사는 나의 이야기를 쭉 듣고는 차갑게 한마디를 건넸다.

   

“본인이 이 병에 대해 다 알고 있네요.”

차갑게 돌아온 한마디에 나는 당황했다. 건강염려증 환자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여기서도 해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스치며 여기서도 못 고치면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마음에 막막함이 몰려왔다.


“티체병이라고 합니다.”

티체병?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명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보네요. 실제로는 염증이 없는데도 염증이 생긴 것처럼 느낄 수 있어요. 약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안심시키는 다정한 말투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찰실을 나왔고, 받아 든 약봉지엔 종합병원에서 처방받았다기엔 조촐한 진통제 한 알씩이 며칠 분 들어있었다.


생소한 그 병명을 잊어버릴까 봐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을 검색했다. 역시 의사의 설명 그대로였다. 치료는 환자를 안심시키고, 소염제를 투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되어있었다. 그제야 그 다정한 말투로 건넨 괜찮아질 거라는 말도 처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식사를 하고 받아온 약을 먹었다. 그간 열흘 넘게 고통받았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렇다. 나는 ‘괜찮다’는 그 한마디가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시작한 웹디자이너 생활. 늦게 시작했기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항상 마음이 조급했다. 구축 디자인팀 소속인데 갑자기 운영 프로젝트 파견을 가라고 하니 왠지 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좌천을 당한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증권사로 선임 한 분과 파견을 갔는데 많은 새로운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증권사이기 때문에 이른 출근 시간에도 적응해야 했다. 게다가 당시는 파견법이 시행되기 전이라서 현업들과 같은 공간에서 바로 옆에 앉아서 일을 해야 했다. 물론 현업들이 좋은 사람들이긴 했지만, 신경이 쓰이고 위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웹에이전시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일을 하다가 금융사의 보수적인 분위기는 꽤 압박이 심했다. 옆에서 현업들은 실적 때문에 종일 사돈에 팔촌, 동창, 지인에게 전화를 돌리고, 매일 실적을 공유하는 피 말리는 상황. 오전에 인사 발령이 나면 오후엔 전무실에 다른 사람이 와서 앉아 있던 살벌한 분위기. 화장실 갈 때 구두가 아닌 슬리퍼를 신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고 품행에 주의하라며 날아오는 전체 공지. 


본사에 있을 땐 디자인 시안만 만들면 됐었지만, 이곳에서는 디자이너가 직접 코딩까지 해야 했고, 웹 사이트 채널 운영만 계약되어 있었는데 현업들은 따로 돈을 주고 업체에 맡겨야 하는 리플렛이나 카탈로그, 심지어 개인의 사적인 행사 디자인까지 요구했었기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집에 오면 진이 빠져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기에 바빴다. 


생소한 분위기, 새로운 업무, 회사와 동떨어져 있는 나를 아무도 방어해 줄 울타리가 없다는 불안감과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꽤 힘들었었나 보다. 그것이 있지도 않은 염증까지 느끼게 했으니 말이다나는 그저 괜찮다는 그 한마디와 진통제 한 알이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그 위로의 한마디 듣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던 오래전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매일 회사에서 날이 선 채로 성가신 인간들과 자잘한 불화들에 잠식되어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그 한마디가 필요했던 것 같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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