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기린 Apr 10. 2024

결국 사랑

요즘 사무실 분위기가 정말 엉망진창이다. 팀장은 온 지가 반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업무가 서투르다. 매달 반복되는 간단한 업무도 처음 하는 것처럼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보면 울화가 치민다. 차라리 일머리가 있는 신입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다 결국 사건이 일어나버렸다.




팀장이 현업이 보내 온 메일을 팀원들에게 공유했는데 첨부된 ppt엔 진행할 수 없는 방향의 지시가 적혀있었다. 반응형 디자인이라 PC와 모바일 화면 구현을 고려했을 때 그 위치엔 배너가 2개만 들어갈 수 있는데, 3개를 넣겠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차장은 그간 참아왔던 것이 터져 나와 팀장에게 언성을 높였다.


“첨부된 ppt 보셨어요? 이거 이렇게 안 돼요.”

“아니요. 안 봤는데요? 일단 공유만 한 거예요.”

“아니, 파일을 확인 좀 하고 공유를 하시라구요!”


차장이 버럭 언성을 높이자, 사무실엔 정적이 감돌았다. 팀장은 동요 없이 말했다.


“업무인데 왜 감정을 섞으세요. 감정적으로 하시면 안 되죠.”

“지금 감정적으로 하게 하시잖아요!”


화가 난 차장의 마음도 이해가 가긴 했지만, 갑자기 화를 내니 괜히 팀장에게 빌미만 준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팀장은 본인에게 기분 나쁘게 하면 내부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 파견지의 일을 본사 그룹장에게 연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번에 그렇게 해결한 사례가 있어서 또 그럴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본사 그룹장에게 전화하고 차장을 불러 본사에 이야기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건 겁주려고 한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회피적이고 유아적인 대처를 하는 팀장의 팀원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자괴감이 느껴졌다. 그런 일로 본사에 연락하는 거면 나는 팀장에 대해 수십번 본사에 메일을 썼을 것이다. 나에게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정말 피곤한 일이다. 좁은 사무실에서 갈등을 안고 하루 종일 가시방석으로 있다 보면 공감 능력이 높은 나로서는 한 것도 없이 피곤함에 절여진다.


집에 돌아와 대충 끼니를 때우고 침대에 널브러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뭣 때문에 이렇게 매일 허무하게 돈을 벌고 살아야 하나?’하는 물음에 도달하자 나는 아무런 답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집을 사기 위해서? 노후를 위해서? 인생 계획을 위해서?


집과 노후... 물론 현실적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와닿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는 하나도 힘이 나지 않았다. 그저 다음 달 카드값을 위해서, 돈은 어쨌든 필요한 것이니까 매일 허무한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얼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문득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하기 직전에 썼던 일기를 들춰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출근을 앞두고 나는 매우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지금보다 이성적인 과거의 내가 옮겨 적어놓은 인상적인 글귀가 눈을 사로잡았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딱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랑할 사람, 할 일, 희망할 일 - Tom Bodett


아... 결국 사랑이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만으로는 강렬한 삶에 대한 힘이 발휘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위해서’, ‘누군가 때문에’ 무언가를 해내는 힘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고 싶은 마음,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 짝사랑하는 그에게 더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 자신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반려동물... 결국 누군가를 위한 삶이 원동력이 되어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틸 힘을 주고,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어떤 그것. 자기 자신만을 위한 힘보다 더 크고 숭고한 힘. 누군가를 위한 사랑.


이번 회사 일만 생각해도 그렇다. 가정이 있었다면, 애인이 있었다면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지나갈 별것도 아닐 일이었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나를 반겨주는 고양이, 강아지를 만나 그 아이들을 몇 번 쓰다듬으면 한순간에 씻길 가치 없는 사건일 뿐이었다. 그까짓 타인의 감정싸움 따위로 회사를 이직하고 싶다 어쩌다 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더 중요하니까. 


그래, 나에겐 사랑이 필요하구나.


작가의 이전글 드러내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