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사주 Oct 22. 2017

2000년대 악전고투 ②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강원, 양여진

1990년대 중후반, 만화계에 불어닥친 대변혁으로 성인을 타깃으로 한 잡지들은 모두 고사한 결과, 소위 '아동지'만 살아남습니다. 쪼그라든 시장, 그보다 더 줄어든 잡지 종류와 수, 나이 어린 독자의 취향과 요구(=판매)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만화/잡지/시장은 더욱 경직되고, 작가들은 하고 싶은 만화와 해야 하는 만화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 피로와 자괴감,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수많은 작가들이 업계를 등지는데, 김강원과 양여진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김강원


데뷔작| 1994년 《바람의 마드리갈》(미완)

대표작| 《여왕의 기사》 《BiBi 아이리스》 《I.N.V.U》(미완)



일찍이 만화를 좋아했고, 예쁜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니 어느새 습작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 만화가가 돼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신일숙 문하로 들어갔다. 깨끗한 데생, 정갈한 연출을 바탕으로 판타지와 거대 서사를 엮는 솜씨가 역시 신일숙의 문하생이구나 싶다. 


김강원은 거대 신파 서사 대신 미시적인 쿨한 일상사가 각광받던 시절, 중세 이탈리아 배경의 거대 역사 로맨스극으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1994년 내놓은 단행본 《바람의 마드리갈》. 15세기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남장 여인 ‘체자레’, 원수의 아들 ‘예로니모’, 체자레와 운명적으로 엮이는 ‘돈 후안’, 후안에게 집착하는 추기경 ‘로엘라스’ 등이 등장하는 로맨스/추리/시대극이다. 거대/신파/서사 대신 미시적인/쿨한/일상사가 각광을 받고, 잡지사 신인작가공모전이 만화가의 공식 데뷔 루트로 자리 잡아가던 시절, 당대의 흐름을 모두 거스르는 행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대서사로 향후 전개가 몹시 궁금한 작품이건만, 그해 김강원의 컬러 삽화 <La Visita>가 『윙크』신인작가공모전에 당선되고, 곧바로 《BiBi아이리스》 연재에 들어가면서 《바람의 마드리갈》은 영영 미완으로 남게 된다. 


기본적으로 과작형인데다, 활동기간이 만화/잡지시장의 질풍노도기와 겹치는 통에 작품이 한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그나마도 스타일과 연재매체 성향과 요구가 달라서 가진 역량을 다 펴지 못한 듯싶다. 아동지 『파티』에 연재한 《여왕의 기사》만 봐도 십대 초반인 독자 눈높이에 맞춰 그림(12등신, 커다란 눈, 눈부시게 해맑은 얼굴), 연출, 플롯, 대사 등등을 하향 손질한 티가 난다. 그 와중에 주인공들의 사랑, 희생, 성장 등을 판타지한 세계관과 함께 능란하게 풀면서, 고만고만한 이성애 학원로맨스물과 차별화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정은 2000년 『쥬티』 창간호부터 연재했다가 폐간과 함께 멈춰버린 《I.N.V.U》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작품마다 국내외,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몰이를 하며 수많은 팬을 양산했으나, 2008년 《I.N.V.U》 5권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유학을 떠났다. 



양여진


데뷔작| 1994년 <호랑이랑> 

대표작| 《세인트 마리》(미완) 《주희 주리》(미완) 《작전타임》 《The Tragic Kingdom-비극의 왕국》(미완)



짧지 않은 활동기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는 바람에 변변한 완결작이 없는 비운의 작가. 1970년생으로,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터로 일하면서 혼자 만화를 익혔고, 두 달간 원수연 문하에서 경험을 쌓아 1994년 『댕기』로 데뷔했다. 이후 『댕기』 『밍크』 『내친구들』 등 여러 잡지를 오가며 장단편을 내다가 2001년 『해피』에 《세인트 마리》를 연재하며 이름을 알렸다. 


가톨릭학교 세인트 마리에 다니는 평범한 중학생 ‘다인’이 어쩌다 학교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에 휘말린다는 내용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관, 거대한 체스판으로 알레고리화 된 학교, 그 안에서 생존을 놓고 싸우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초능력과 함께 버무렸다. 단순하게는 SF학원물, 거창하게는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속절없이 희생당하는 소년소녀들의 (정신없는) 서사로 주목 받았지만, '대중적인'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중도 퇴출되었다. 이후 연재 없이 단행본으로만 작품을 이어갔으나 도저히 수익을 낼 수가 없어서 결국 미완으로 끝났다.  


《세인트 마리》의  방향을 놓고 편집부와 갈등하던 양여진은 그간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절필을 선언한다.  


사정은 비슷한 시기 『비쥬』에 연재하던 《주희 주리》도 다르지 않다. 성격이며 가치관이 서로 다른 자매의 현실감 넘치던 성장기는 2004년 잡지가 폐간하면서《세인트 마리》의 전철을 밟았다. 이 사이 인터넷 만화플랫폼 ‘만’에서 《The Tragic Kingdom-비극의 왕국》을, 계간 『뷰티풀라이프』와 『그루』에 《小夜曲》을 연재했지만 이조차도 매체가 사라지면서 중단되거나 중편으로 마무리됐다. 



나날이 줄어드는 지면, 외부 요인으로 인해 작품을 강제 중단해야 하는 현실, 호황기나 불황기나 한결같이 열악한 작가 처우, 폭발적으로 증가한 대여점과 그로 인해 뚝 떨어진 단행본 판매량, 저작권을 무시하고 만화책을 스캔해 보는 독자들 틈에서 고군분투하던 양여진은 결국 건강을 이유 삼아 2010년 절필했다. 그후 종교 관련 작업 말고는 통 얼굴을 안 비치다가, 2014년 웹 소설가로 변신해 《안개의 섬》을 썼다. 그 이듬해 작가로서의 책임감과 팬들의 성화에 떠밀려 ‘코믹스퀘어’에 《주희 주리》 재연재를 시도했으나, 2016년 플랫폼이 매출 부진을 이유로 작가들에게 더 이상 고료를 지급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다시금 중단되었다. 코믹스퀘어와 계약을 해지한 뒤 양여진은 두 번 다시 만화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2000년대 악전고투 ①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은희


2000년대 악전고투 ③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조주희, 한승희


2000년대 악전고투 ④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김민희, 박소희



[한국 순정만화 작가 사전] : 여성/만화/작가 중심의 한국 만화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