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번스 作, 「밀크맨」과 최은영 作, 「밝은 밤」
밀크맨을 읽었다. 애나 번스라는, 먼 나라에 사는 낯선 작가의 소설. 북아일랜드 분쟁이라는 알듯말듯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가진 이야기. 심지어 소설 안에는 이야기의 그곳이 북아일랜드인지 아닌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조차 없었다. 아니, 있었다. 아주 생생한 묘사들은 있었다. 더 이상 구체적일 수 없을만큼 등장인물들의 일상 속에서 미립자 수준으로 침투하는 전쟁과 폭력의 현장이 숨막히게 펼쳐져 있었다. 그럼에도 언급은 없었다. 그곳의 지명이 무엇인지, 그들이 겪고 있는 사건의 역사적 명칭이 무엇인지.
사실 전쟁의 이름은 전쟁 당시에는 알 수 없다. 익히 알고 있는 과거의 왕의 이름들이 그렇듯 사람들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존재에 대해 일단은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시간이 끝나고 나야 그것을 평가하고 이름을 붙여오곤 했다. 한국에서 벌어져서 한국전쟁인 한국인에게 익숙한 어떤 전쟁도 외국에서 보면 한국내전이던 시기가 있었고 발발일을 따서 625전쟁이라 부르기도 했고 북에서는 북침전쟁, 남에서는 남침전쟁으로 이런 저런 입장에 따라 여러 이름들을 붙여왔다. 그러니 어느 아침 잠에서 덜 깬 어떤 아이가 동네가 술렁이는 소리에 뒤척이다 벼락같이 방문이 열어젖혀지고 파랗게 질린 처음보는 표정의 아버지가 떨리는 손으로 채근하여 집 밖으로 뛰어나와 먼 길을 향하게 될 때에, 그저 산골에서 콩밭뙤기나 메며 올여름 더위는 시모살이보다 더할까 덜할까 흥얼거리던 아낙이 한순간에 파편으로 흩어져버릴 때에, 해변 도시에서 정시출근을 한 사무원이 점심시간에 그 사람에게 말을 건넬까 말까 고민을 싱글거리던 중에 날아든 급보에 한동안 멍하니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 때에, 그들에게 전쟁은 그저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전쟁'일 뿐, 그 어떤 전쟁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참상, 시체, 무기, 흙더미와 피, 사지가 잘린 사람들과 미사일, 결정을 내리는 수뇌부와 고향을 그리는 군인들을 떠올린다. 동시에 피난행렬, 가족을 잃은 비통함, 미아, 강간, 약탈, 사상검증과 굶주림 같은 것들이 연상된다. 주로 영화나 TV를 통해 접해 온 전쟁의 이미지들. 그것이 과거의 전쟁이든 현재의 전쟁이든 그 안에는 항상 거대한 폭력에 휘말리는 평범한 인물들이 있고 극적이며 비극적인 사연들이 있었다. 너무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지금 여기의 전쟁'과 그 전쟁 속 사람들. 그러나 밀크맨 속 주인공에게도, 소설 밝은 밤 속 삼천이에게도 그런 모습은 없다. 잠깐 잠깐 그런 순간들이 지나가기는 해도 그들이 독자에게 주로 보여주는 것은 꼼짝할 수 없는 괴물에 짓눌린 SF적인 전쟁의 모습이 아니라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여성의 모습이다.
삼천이는 밝은 밤 주인공의 증조할머니로 한국전쟁 당시 청년기를 산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아이가 있고, 남편과 시댁도 있었고 남쪽 지방으로 피난도 다녀왔다. 그의 '전쟁경험'은 이쯤이면 익히 들어온 이야기일 수 있다. 마치 북아일랜드 분쟁이 그렇듯 '아아 그 이야기구나'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밀크맨의 주인공도 삼천이도 전쟁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순히 보다 참신한 접근을 통해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한 시도는 아니다. 그들에게 '지금 여기의 전쟁'은 별 의미가 없다. 수 많은 목숨의 증발과 삶의 터전이 황폐화되는 일이 아무 것도 아니라거나 그들이 전쟁의 영향 밖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다른 전쟁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지금 여기의 전쟁'은 '항상 있는 전쟁'에 비해 더 유난하거나 더 크거나 더 집요한 상흔을 남기지 못했다는 말이다.
북아일랜드 분쟁이 일어난 이유는 역사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인터넷 조금 뒤져서 몇 자로 쓰기엔 상당히 복잡해보인다. 실례를 무릅쓰고 단순화해보자면 거기에는 종교, 종족, 정치, 그리고 경제적 갈등이 있었다. 방금 쓴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종교, 종족, 정치, 그리고 경제적 갈등. 현재의 그 어떤 지역이나 국가라 한들 이 갈등들이 없는 곳이 있을까.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당시의 한반도에서 종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일단 열외로 두자. (하지만 한국전쟁의 배경이 된 분단이나 분단의 배경이 된 일제는 어느 정도 종교적 색채를 띠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이 글에서 다룰 이야기는 아니다.) 한반도는 별스럽게도 단일종족이 살아온 편에 속하여 종족 갈등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의 주요갈등은 정치, 그리고 경제였다. 한반도 내의 정치적 분화, 국제정치에서의 갈등의 집약적 표면화, 전쟁장사와 이를 통한 외국 내의 정치적 문제해결, 그런 힘들의 부딪힘이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지속했고 종결하지 않기로 했다. 종전이 아닌 정전 상태의 한반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니 당시의 갈등은 종결되지 못했고 여전히 한반도는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것들도 '항상 있는 전쟁'의 일부이다. 이 전쟁 속에서 개인은 언제나 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삼천이와 밀크맨의 주인공에게는 여기에 전쟁의 요소가 몇 가지 더 추가된다. 아마도 고대 사회 이후로는 '지금 여기의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고 있는 요소들. 그것은 성과 연령이다.
비교적 젊은 여성에게 삶은 전쟁이다. '지금 여기의 전쟁'은 인간의 추악함을 보다 잘 드러내는 장치일 수는 있지만 강간은 평시에도 폭격처럼 여성의 몸을 유린한다. 피난길의 굶주림이 생존과 인간성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권에 대한 접근을 차단 당하고 비굴하게 가부장에 종속됨으로서 생존해온 여성에게 그것은 그렇게 새로운 위협이 아니다. 전시에 적국에 '붙어 먹는' 여성에 대한 클리셰가 있다. (물론 제 몸 하나만이 아닌 주위 많은 이들의 희생을 걸고 '더 크게 붙어 먹는' 남성에 대한 클리셰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 놓인 여성은 때로는 비겁자나 변절자로, 때로는 생존자로 그려진다. 가부장을 내면화한 채 외모와 성격, 성향과 취향까지 근원이 분명한 '여성성'으로 무장한 여성들 역시 때로는 비겁자나 변절자로 손가락질 받지만 한편으로는 생존자로 그들이 택한 전략을 존중받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살아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만든 도덕과 내가 인정하는 철학을 저울질하는 여유조차 때때로 허락되지 않는, '항상 있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밀크맨의 주인공에게도 전쟁은 이토록 미시적이다. 이름, 산책로, 독서취향, 술을 마실지 말지, 춤을 출지 말지를 결정하는 모든 기준은 적과 아 사이의 구분 만큼이나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서 이 전쟁은 또한 가시적이다. 젊은 여성의 일과, 행동, 선택, 말투, 시선과 몸놀림 모든 것이 폭압 하에 감시받는다. 하지만 그의 마음, 진실, 의도, 연애감정, 공포, 혐오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내내 속으로 말한다. 속으로 싸우고 속으로 기록하고 속으로 분석하여 독자에게 낱낱이 전하는 그의 경험은 그래서 열배 스무배로 독자를 압도한다. 하나의 사건은 매 순간 그가 느낀 느낌과 그 순간마다 스쳐 지나간 고민과 나중에 다시 떠올릴 때에 덧붙은 후회와 자책, 변명, 객관적인 사실과 비판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독자는 숨이 막힌다. 이미 내 삶에서도 내내 겪고 있는 전쟁의 한 가운데로 다시 불러내어 진다. 그리고 주인공의 내적 투쟁의 언어를 고스란히 내 삶에 투영하게 된다. 삼천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백정의 딸이라서 받았던 멸시보다 난데없이 구원자를 자처한 사내의 냉대 속에서 더욱 쪼그라들던 그 시간 동안 아마도 그 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을 그 투쟁이, 이 모든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모든 여성의 마음 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소한 작가의 처음 만나는 소설, 이국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정확히 짚어지지도 않는 이름 없는 인물들의 교차에도 불구하고 밀크맨이 첫장부터 마지막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이것은 나의 전쟁이고, 이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끝은 아직도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