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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각주 May 28. 2019

[이장욱]당신과 나는 꽃처럼

당신과 나는 꽃처럼



당신과 나는 꽃처럼 어지럽게 피어나

꽃처럼 무심하였다.

당신과 나는 인칭을 바꾸며

거리의 끝에서 거리의 처음으로

자꾸 이어졌다.

무한하였다.

여름이 끝나자 모든 것은 와전되었으며

모든 것이 와전되자 눈이 내렸다.

허공은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가득 찼다.

누군가 겨울이라고 외치자

모두들 겨울을 이해하였다.

당신과 나는

나와 그는

꽃의 미래를 사랑하였다.

시청각적으로

유장하였다.

당신과 그는 가로수가 바라볼 수 없을 만큼

화사하고

그와 나는 날아가는 새가 조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신하고

나와 당신은 유쾌하게 떠들다가

무표정하게 헤어졌다.

우리는 일에 몰두하거나

고도 15미터 상공에 앉아

전화를 걸었다.

창가에 서서 쓸쓸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자

다시 당신이 지나가고

배후에 어지러운 꽃이 피었다.


#이장욱 ,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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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는 다른 뿌리를 가지고 다른 진폭으로 흔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꽃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채우고 같은 바람에 흔들린다. 꽃은 행진이다. 우리는 행진이라는 이름의 하나, 하나의 계절이다. 


여름이 끝나자 모든 것은 바뀐다. 생명은 소멸을 준비하고 푸르름은 말라간다. 허공은 바람과 기압골의 영향을 받은 눈들의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가득해진다. 모두가 겨울이라 부르는 시간은 누군가의 호명으로 갑자기 닥친다. 꽃과 행진의 시간이 종언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터져나온다. 당신과 나와 그는 각자 다른 전망 속에서 꽃의 미래를 상상한다. 꽃의 미래는 겨울 안에 있지만 누구도 꽃의 미래를 호명하지 못한다. 누군가 '역사의 종말'이라고 외치는 순간 그랬던 것처럼, 자각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겨울을 몰아낸 봄의 기운과 모든 것이 격렬한 여름의 기운은 마법처럼 혹은 당연하다는 듯이 거리 속으로 사라진다. 이 사라짐은 설명되지 못한다. 


이제 계절은 없다. 꽃의 화사함은 계절의 선물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연의 순환처럼 겨울이 사라지고 다시 봄이 올 것이라는 전망은 없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이유는 내가 빠르게 바뀌기 때문이라는 것을, 15미터의 상공에서 조망한다. 당신의 배후에서 피어나는 꽃은, 당신이 계절이라고 당신이 여전히 겨울의 외부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꽃의 화사함일까, 꽃의 미래였을까, 아니면 꽃 자체였을까. 


고도 15미터에서 나는 세상을 조감한다. 꽃의 계절이 와도 나의 고도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더이상 생로병사에 관여하는 계절의 일부가 아니다. 겨울이라 호명된 견고한 높이, 그곳이 내가 있는 지점이다. 당신은 여전히 계절 안에 있다. 나의 쓸쓸함을 만드는 것이 나의 높이인지 당신의 계절인지 나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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