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도 없는 데 무슨.. 이래 놓고 며칠 만에 번개.

by 이향

그럭저럭 캘리의 겨울은 깊어지는 중이었지만, 12월 말에 퍼붓었던 눈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고도가 높은 지대라지만, 기온이 한창 오르는 한낮의 기온은 하루에도 몇 뼘이나 되는 눈을 먹어치웠다. 한낮에 녹을 대로 녹았던 눈밭은 밤사이 내려간 온도로 꽝꽝 얼어붙는 중, 그야말로 얼음깡판에서 스키를 타는 형국이었다.


매주말 쉬지 않고 드나드는 매머드 스키장과 다르지 않게 유타주의 스키장에서도 곡소리가 들려왔다. 미디어에서는 스키장을 개장한 이래 흙바닥이 이 정도로 눈이 없기는 수십 년 만에 처음이라고 요란스럽게 보도한다.


작년 때 이 맘 때쯤, 맘에 맞는 선배들이랑 몇 명이서 스키 트립을 계획했었고, 어느 누구 하나 중도에 포기할 일 없다는 호언장담하에, 싼값에 나온 할인가로 방을 예약했었다. 날자가 다가오니 다들 고민하는 눈치이다.


“ 형! 11시간 꼬박 운전해서 가는 건데, 눈이 없는데 우리 가는 게 맞아요?”

“ 어쩌냐, 그래도 예약해 놓은 건데 같이 모여서 밥만 먹고 오는 한이 있어도 가긴 가야지…”


1월 한 달 내내 단톡방에 불이 나듯 대화가 오고 갔다. 눈소식은 2월에도 없는 듯해 보였다. 그러던 차에 선배님 두 분이서 1200마일 거리에서 단숨에 매머드로 원정을 내려오시는 일정이 잡혔다. 불시에 모인 번개모임에 바빠진 것은 나 혼자인가였던가? ㅎㅎ


일요일 매머드에서 내려오자마자 월요일부터 장을 보고 메뉴를 짜고 짐을 풀어서 빨래가 마르기도 전에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매주 6시간 달려 도착하는 곳이라지만, 먹거리를 준비하는 내게는 한주의 일정은 꼬박하며 빠듯하다. 대략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이다.


1. 돌아오는 일요일 밤 차고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짐을 내린 후, 아이스박스에서 음식을 꺼내 남은 음식은 위층 부엌으로 옮기고 나중에 쓸 것들은 차고에 위치한 냉동실과 냉장실로 각기 보관된다.

2. 주말에 썼던 침구는 거실로 옮겨 커버를 벗기고 상온에서 말리기 위해 소파나 식탁의자를 이용해 널어둔다.

3. 신발은 신발장으로 이동하고, 이동식 화장실(ㅎ)은 깨끗이 씻어 말리는 과정을 거친다.

4. 밤늦게까지 빨래를 돌려야 하므로, 모아서 가지고 온 빨래와 그동안 쌓인 빨래를 먼저 시작한다.

5. 썼던 식기와 텀블러들은 위층 부엌으로 이동해서 다시 한번 깨끗이 씻어 건조를 위해 늘어놓는다.

6. 먹다 남은 음식 정리와 양념통은 다시 재정비하거나 따로 냉장고 안에 보관한다.

7. 허기가 지기 전에 뭔가 요기를 해야 한다. 대부분 남겨온 음식을 먹던가 간단식으로 해치운다.

8. 세탁이 끝난 빨래를 건조기에 넣던가 건조대에 널어준다.


위와 같은 동작들이 모두 끝나는 시간은 대부분 밤 11시가 넘게 된다. 그때서야 몸을 씻고 회사 갈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


KakaoTalk_20260416_164420119.jpg 매주말 목요일 저녁엔 이렇게 늘어놓고 짐을 싼다.

겨울 내내 이어지는 강행군에도 버텨내는 건, 부모님이 물려주신 강철 체력 그리고 무한량의 깡이라고 할까? 일 년 한 두 차례 먹은 것이 잘못돼서 장염을 앓는 탓에 며칠씩 쌩으로 굶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외, 감기에 걸려도 하루 이틀이면 대부 부분 털고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캘리의 채 두세 달도 안 되는 겨울을 포함해 일 년에 최소 4개월은 스키를 타는데 한주도 빠지지 않고 동행하는 나를, 어느 누구는 사람의 힘이라고 하고, 어느 누구는 연애이니 가능하다 하고, 어느 누구는 전인류를 향한 모성애라 표현한다.ㅎㅎㅎ


대답이 무엇이 맞는지 잘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몸이 고단하고 입안이 허는 경우까지 있는 강행군은 맞지만 나는 그 매번의 강행군이 싫지 않다는 것이다. 천생연분… 이 혜택을 누리는 누군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음이 분명할 일이다.

KakaoTalk_20260416_172847562.png 남대문에서 옷파는 아줌마 찐포스 싱크로율 100% 그가 나이다.


새벽 1시가 다 돼가는 일요일 밤, 나는 군시렁거리면서 유타 트립 대신 매머드에서의 번개 모임을 위한 메뉴판을 짜고 있다.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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