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금요일 저녁에 떠나서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는 48시간의 일정은 단순하긴 하다. 사용한 그릇을 씻고, 2주에 한번 정도 이불 커버를 갈고, 썼던 베개는 햇빛에 말리고, 마른빨래를 가방에 넣는 과정은 루틴이다. 밀당 수준의 관계도 아니니 매 주말 멋진 옷차림으로 매번 다른 패션쇼를 하는 것도 아니니 매번 입던 셔츠나 겉옷은 세탁 후 매번 그대로 옷가방으로 직행한다. 날씨가 좀 더 추울 거란 예보가 있다면 겉옷을 한번 더 챙기거나 눈폭풍에 대비한 좀 더 두터운 신발로 바꾸는 정도.
하지만, 이번 선배님들과의 일정은 목요일부터이다. 목요일 업무를 마치고 매주 늘 그러하듯 빛의 속도로 집으로 달려 1시간 이내에 출발하였다. 가면서 먹을 김밥은 점심시간에 투고해서 서늘한 공간에 보관해 두었었다. 떠나가는 길에 버뱅크 공항에 들러 시카고에서 오시는 한 분을 픽업했다. 스키장으로 가는 6시간, 새로운 누군가를 익히기엔 짧다면 짧은 하지만 길다면 한없이 길 수도 있는 시간이다. 스키를 타기 시작한 지 2년여 되셨다는 이분, 거대한 몸과 반응속도를 봐선 고희연새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분 유 선생님께 배운 논리는 거의 레벨 4 수준이다. 레벨이라는 것은 스키전문 자격증 같은 시스템인데, 한국의 정우찬 프로 같은 분이 레벨 4이고 그 외 레벨 1이나 2는 꽤 많은 분들이 보유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논리로 레벨 4인분이 정작 스키에 입문한 지가 2년밖에 안된다는 것…ㅎㅎ
논리 레벨 4에 준한 눈에서의 실제 실력이 얼마인지를 가늠하느라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도착. 시간은 밤 10시가 이미 넘은 시각.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시애틀 선배님들과 반갑게 해후하고 늦었지만, 간단히 컵라면과 준비해 간 샌드위치를 맥주 한잔씩과 함께 요기를 하였다. 몇 년 만에 만나는 반가운 수다를 떨다 보니 자정이 넘었다. 숙소에는 시애틀 선배 두 분과 시카고 선배님이 묵으시기로 했고, 나와 파트너는 캠퍼밴에서 취침하는 것으로 결정.
누군가는 따스한 공기와 포근한 침대가 있는 숙소를 놔두고 왜 좁은 캠퍼밴에서 자느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캠퍼를 즐기는 우리 입장에선 그것은 절대 모르는 소리.. 일뿐.
집에서 자는 침대 매트리스와 다를 바 없이 적당히 포근한 침대 그리고 나와 파트너의 체취가 묻어있어 익숙한 베딩. 작지만 내 머리를 편하게 감싸주는 베개가 솜이 뭉쳐 이리저리 아무리 굴려도 편해지지 않는 호텔베개는 사양. 더구나 개인적으로 유난스러운 성격이 아님에도, 유수의 체인호텔도 아닌 에어 비엔비 숙소의 침구는 조금은 꺼림칙하기도 하다.
이래저래, 비좁고 화장실이 불편하긴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캠퍼에서의 취침이 우리에겐 딱이다.
그렇게,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눈을 붙이고 좋은 명당자리를 위해 새벽 5시에 전원 기상하여 리프트 코앞에 자리를 잡는다. 평소 같으면 차를 세우자마자 다시 곯아떨어져서 아침 7시 30분 정도까지는 늘어지게 자야 하는데, 선배님들과의 번개 모임이니 그대로 깨어서 스키부츠를 신는 순간까지 수다행진이 시작된다.
비좁은 캠퍼밴에 다섯 명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와중,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물을 끓이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베이글을 구워 아침을 준비한다. 데판야끼라는 음식이 있다. 일본식 철판구이라고도 하는 이것은, 음식을 만드는 셰프를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포위하는듯한 테이블이 설치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위치한 널따란 구이철판에서 지글거리는 고기를 굽거나 탕탕거리며 야채를 볶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판구이하면 베니하나라는 음식점을 떠올리며, 후끈 달아오른 철판에서 솟아오르는 불쇼, 셰프 위로 날아다니는 칼쇼를 포함해 눈을 즐겁게 하는 엔터테인먼트까지를 포함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베니하나 셰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섯 명의 건장한 남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커피를 내리고 사과를 깎고 베이글을 구워 접시에 올린 뒤 크림치즈를 바르는 과정. 이 모든 것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는 것이다. VIP손님에게 최고급 와규를 구워내는 과정은 아니지만, 경력 높고 나름 대선배분들 앞에서 정성을 깃들여야 하는 드립커피를 내리는 과정과 얌전히 사과를 깎아내는 과정은 매번 나를 긴장하게 한다. 아끼지 않고 건네는 선배님들의 칭찬은 나를 또 춤추게 함은 물론이고.
흑백요리사의 최강록 셰프나 최고봉 어르신 후덕죽 셰프와 비교할 수 없는 미미한 주제이지만, 정성을 다하고 진심을 쏟아 만들어내는 음식을 알아주시는 분들 덕에 나는 자주 춤추는 고래가 되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