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의 쓸모에 얽매이지 말고 일단 담아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지아의 상인(the trader)>의 첫 장면은 감자밭에서 시작한다."
조지아의 작은 마을에서 감자를 키우는 농부가 자신이 필요한 물건과 감자를 바꾸기 위해 흥정을 시도하고 있다. 이후 카메라는 오래된 차를 끌고 감자를 경작하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잡동사니들과 감자를 교환하는 상인의 행적을 뒤좇는다.
다큐멘터리가 소개하는 조지아의 상인은 그 옛날 시장을 돌며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던 우리네 보부상과 닮은꼴이다. 1990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 조지아에서는 이처럼 현대판 보부상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산악 지대에 자리해 있어 이동이 쉽지 않은 마을 사람들에게 상인들은 물건과 물건을 맞바꾸어 교환경제가 이루어지도록 중간자 역할을 하며 가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받고, 무엇이든 판다.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었다고 천시하거나 반대로 값이 나가는 사치품이라고 외면하는 일이 없다. 상인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상인들의 흥정 대상이 된다. 그래서 조지아의 상인에게 봇짐이나 등짐이라 할 수 있는 차 트렁크에는 생활에 필요한 온갖 품목들이 다 들어있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앞이 막막해질 때가 있다. 무엇에 대해 쓸 것인지 글감은 정했지만 그 글감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글감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들을 쓰자니, 남들이 이미 다 썼던 뻔한 내용이고 내가 남들보다 더 뛰어난 솜씨로 이야기를 풀어낼 자신 또한 없다. 그렇다고 독창적인 생각들만 추려 서술하려니 글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공감을 받지 못할까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이어지다 보면 결국 글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혹은 첫 문장을 시작도 하지 못하는 내 실력이 모자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몰려든다. 이렇게 고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다. ‘조지아의 상인’처럼 품목을 가리지 말고, 그리고 당장의 쓸모에 얽매이지 말고 일단 나의 보따리에 담고 보는 것이다. 나중에 모조리 담아둔 것들을 펼쳐 보면, 그중 나만의 스토리를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재료들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이때 유의할 점은,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잡아채어 지면에 써놓는다는 것이다. 뭐 이런 게 쓸모가 있을까 하는 것들도, 지나고 보면 좋은 스토리의 밑천이 될 수 있다. 메모장이 되어도 좋고, 노트북이 되어도 좋고 내가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가장 빨리 옮길 수 있는 도구를 펼쳐라. 그리고 논리나 평가란 잣대는 저 뒤로 숨기고 우선, 필터링 없이 내 안의 이야깃감들을 쏟아내 보자. 이때 핵심은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에피소드에 대해 가치 판단은 뒤로 미루라는 것이다.
‘커피’라는 글감을 잡고 한 편의 교양 프로그램을 써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단편적으로는 커피의 종류나 커피의 역사, 커피를 생산하는 국가 등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서 나열할 수 있다. 바리스타는 어떤 커피를 좋은 커피라고 생각하는지, 커피 중독은 어느 정도 수준을 말하는지, 커피 소비에 드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내가 직접 궁금한 것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술할 수도 있다. 보다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커피와 건강의 관계를 다룬 정보 이면에 숨은 이해관계를 파헤칠 수도 있고, 커피의 특정 브랜드사가 흥망성쇠를 겪은 과정을 해석해 사회에 던지는 경제적 메시지를 찾아볼 수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풀어쓸 때는 ‘독자나 시청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관해 아직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생각의 흐름대로 옮겨 써서 정리하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유난히 풍부한 항목이나 질문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부분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대중에게 알려주고 싶은 메시지일 가능성이 크다. 보부상이나 조지아의 상인처럼 커피라는 소재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스토리텔링의 장에 충분히 펼쳐 놓았다면, 무엇에 대해 더 깊고 자세히 쓸 것인지에 대한 선택과 판단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한 편의 글을 쓸 때 짧게 쓰는 것이 쉬울까, 길게 쓰는 것이 쉬울까?"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일단 분량이 긴 글을 써야 한다고 하면 부담이 밀려오는 것이 사실이다. 방송 작가인 나도 같은 주제로 글을 쓰더라도, 10분짜리 짧은 꼭지를 만들 때보다 60분짜리 영상을 만들어야 할 때 어떤 문장이나 문단들로 채워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이럴 때 나는 기차를 한 칸, 한 칸 이어 붙여 완성된 본체를 만들듯 연결의 힘으로 글을 쓰라고 제안한다.
올해 일곱 살 된 조카가 나를 만날 때마다 불러달라는 노래가 있다. 지독한 음치여서 웬만하면 노래를 부르지 않지만, 조카의 애교에 넘어가 매번 노래를 부르게 된다. 바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것은 사과”로 시작하는 노래다. 언제부터 이 노래를 불러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처음에 노래 가사가 기억나지 않아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지하철, 지하철은 편리해, 편리한 건 컴퓨터” 등 뒤로 갈수록 내 맘대로 개사를 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고, 매번 부를 때마다 달라지는 가사가 재미있었는지, 조카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조른다. 마치 천일동안 이어지는 설화가 담긴 <천일야화>에서 왕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어 여인을 죽이지 않았던 것처럼.
글쓰기도 노래를 이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내용들에서 공통점이나 연결지점을 포착하여 이어가다 보면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앞서 예를 들었던 커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다양하게 펼쳐 놓은 에피소드나 정보들 중 커피 소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쓰고 싶어 졌다면, 커피 소비와 공정 무역을 연결해 글을 쓸 수도 있고, 하루 종일 카페인의 힘을 빌려야 하는 우리의 노동 시간과 강도의 연관성을 주목할 수도 있다. 밥값에는 지갑을 열지 않아도 커피와 디저트에는 ‘작은 사치’를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소비 행위를 문화심리학으로 읽어보는 글을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이야기의 조각조각들을 이어 붙여 쓰면 길게 써야 하는 글도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다.
나중에 글이나 방송이 완성된 후 확인하면 앞서 이어 붙인 내용의 상당 부분을 사용하지 않고 편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해도 글로 정리하는 순간, 종이나 컴퓨터 모니터 위에 모습을 드러낸 내용들은 하나의 콘텐츠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비록 세상에 나가지 못할 내용이라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나만의 글쓰기 잡화점을 가진 것이 되니, 작가로서 재료들을 가득 갖고 있다는 든든하고 배부른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