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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Apr 22. 2019

지나친 배려가 남긴 것

홀로 응급실을 찾은 그날의 기억

평소 남편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다섯 시간 안쪽이고 새벽 세, 네 시에 깨기 일쑤다.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도 어려워해 아침까지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반면 나는 타고난 '잠 꾼'이다.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곧 잠을 청할 수 있고, 낯선 여행지에서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일이 거의 없다. 오죽하면 남편이 나에게 "하나, 둘, 셋"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겠는가. 옆에서 "나 졸리네. 먼저 잘게요."라고 말해서 잠시 고개를 돌려보면 바로 숙면 모드로 전환되어 있단다. 3초면 잠이 드는 나의 능력이 경이롭다며 놀리곤 한다. 사실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다면 나는 10시간, 아니 24시간 수면도 거뜬히 이뤄낼 자신이 있다.      


이런 내가 결혼 후 한 번은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리를 헤맨 적이 있다. 전날 저녁, 지인들과의 모임이 있었고 한식당에서 꽃게탕을 먹었다. 꽃게탕을 한술 뜨는 순간, 비릿한 향이 느껴져 망설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워낙 후각이 예민해 그렇다고 생각하고 밥을 말아서 국물까지 후루룩 마시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평소처럼 베개에 머리가 닿은 지 3초 만에 잠이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잠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엉덩이부터 살살 가렵기 시작하더니 몸이 더워지고 그 열기에 가려움증은 점점 등을 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번 잠들면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 나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갔다. 불을 켜고 얼굴과 몸을 거울에 비춰 본 후 깜짝 놀랐다. 온몸이 울긋불긋하고, 좁쌀만 한 두드러기들이 쏟아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입술도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아차'싶었다. 비상약 통에 알레르기약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남편을 깨울까 잠깐 생각했지만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핼쑥해진 얼굴을 보니 그만두자 싶었다.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는 않으니 혼자 해결하자고 마음먹었다.      


불도 켜지 않고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 밖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바로 2차선 도로가 있고, 인근에 상가도 있어서 평소엔 어렵지 않게 택시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새벽녘의 집 밖 풍경은 낮과는 확연히 달랐다. 도로는 황망할 정도로 조용했고, 상가의 불빛도 모두 꺼진 후라 우주에 나 혼자 떠다니는 기분마저 들었다. 할 수 없이 버스들이 다니는 더 큰 도로 쪽으로 한참을 걸어내려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 멀리서 반가운 불빛이 보였고 있는 힘껏 팔을 흔들어 나의 존재를 알려 택시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거리에서 한참을 헤맨 것에 비하면 응급실은 금방 도착했다. 택시로 5분 정도 달려 병원에 도착했고, 응급실이 한산한 덕에 빠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팔에 주사를 맞고 침대에 누워 병원의 천장과 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졌다. 혼자 병원에 누워있는 내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져 서러움이 몰려왔다. 분명 옆에 자던 남편을 깨우지 않은 것은 나인데도 말이다.      


주사를 다 맞고 조금 있으니 가려움이 잦아드는 것 같아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싶어 방문을 여니 다행히 남편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며칠 미룬 잠을 몰아 자듯이 새근새근 숨소리까지 내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남편에게 새벽의 긴박했던 상황을 들려주었다. 주사 자국과 남은 두드러기들을 보여주며 무용담처럼 병원에 다녀온 과정을 늘어놓는 나를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한참 쳐다보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뒤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아? 오늘은 병원 안 가도 돼? 약은 받아 왔어?"         


그러더니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나가버렸다.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고 화가 난 건지, 말을 하지 않으니 본심을 알 수 없었다. 나도 남편을 생각해서 한 행동인데 왜 저러나 싶어 서운한 감정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편은 한 손에 죽을 사들고 들어왔다. 한동안 음식을 가려서 먹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빈속에 약을 먹을 순 없으니 죽이라도 꼭 챙겨 먹으라고 했다. 응급실 소동은 사랑을 실은 죽 한 그릇에 마무리되는 듯했다.     


며칠 후 시누이와 전화 통화를 하게 됐다. 자매가 없는 나는 손위 시누이를 '언니'라고 부르며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현재도 아동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언니는 늘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날도 나의 편을 들어주기를 기대하면서 홀로 응급실을 찾았던 새벽의 일화를 꺼냈다. 그런데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언니는 전에 들은 적이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배우자가 아파서 응급실에 다녀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잠만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마음이 어떨까? 과연 아내가 나의 단잠을 안 깨워져서 참 고맙구나라고 생각할까? 내가 무심한 배우자가 된 것 같아 두고두고 자책하고 오랫동안 미안한 기억으로 남지 않겠니?  주미야, 때로는 지나친 배려가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어."     

그랬다. 남편을 배려한다며 했던 행동이 오히려 그에게 당혹감과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날의 기억이 남편에게 상처가 됐다는 사실은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나의 낯빛이 이상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이런 말을 건넨다.     


"여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해. 혼자 참거나 숨기지 말고. 알았지?"     


주변인을 배려한다며 한 행동이 오히려 그들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건은 또 있었다. 3년 전 폐 수술을 받은 친정 엄마는 대학병원에서 꾸준히 정기검진을 받고 계신다. 한동안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오가는 일을 내가 도맡아 했다. 수제 맥주집을 운영해 새벽이 되어서야 일이 끝나는 동생이 피곤할까 봐 엄마 병원은 내가 책임지겠노라며 고집을 부렸다. 남편이나 올케에게 맡기기에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차가 없는 내가 엄마를 모시고 대학병원으로 향하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왕복 세 시간의 거리를 오가야 했다. 나도 물론 힘들었지만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엄마도 점점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를 지켜보던 올케가 한마디 했다.      


"형님, 형님이 혼자서 그렇게 다 하시니 저희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들도 자식인데 기회를 주셔야죠. 저희는 차도 있으니 어머니도 더 편하게 움직이실 수 있잖아요. 어머니 병원 진료라도 저희가 맡게 해 주세요."     


일 년 전부터 엄마의 병원은 동생이 동행하고 있다. 편안한 차로 모시니 엄마 역시 한결 편안해하시는 눈치다. 돌이켜 보니 다른 가족들의 피곤을 덜어주려고 힘든 일은 내가 하겠다며 나선 것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했던 것 같다.     


상대를 배려한다고 했지만 실은 나의 마음이 편하자고 한 이기적인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는 '배려'라고 쓰지만 누군가에겐 '거리감'이라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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