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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Feb 06. 2018

주워들은 이야기에서 방송 소재 발견하기

히어로의 능력을 빌리자!


영화 ‘원더우먼’을 다시 보았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그녀가 인류를 구원하는 이야기는 여성이 봐도, 아니 여성이 봐서 더 흥미로운 스토리였다. 그런데 내가 꼽는 최고의 여성 히어로는 따로 있다. 그녀는 바로, 소머즈!

‘소머즈’는 미국에서 70년대에 만들어진 시리즈 드라마로 원제는 ‘The Bionic Woman’다. 제목 그대로, 교통사고로 인해 기계인간으로 변한 제이미 소머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를 동경한 나머지, 대학 시절 영어 학원에서 나의 영어 이름은 ‘제이미’였다.

교통사고로 대수술을 하면서 한쪽 팔과 두 다리에 엄청난 능력을 지니게 된 소머즈는, 악당이 나타나면 ‘뚜뚜뚜뚜’라는 음향 효과와 함께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런 그녀의 능력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청력’이었다. 기계로 만든 오른쪽 귀는 그녀에게 뛰어난 청력을 선물했고, 그 능력으로 악당들의 음모를 엿들어 멋진 작전을 짰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녀의 무쇠 팔, 무쇠 다리보다 뛰어난 청력을 부러워했다. 아마 타인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점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소머즈’란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다. 시끄러운 식당이나 술집에 가면 남들은 소음 속에서 앞자리에서 말하는 소리도 잘 듣지 못했지만, 난 마치 통역사처럼 서로가 하는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소음 속에서도 신기하게 그들의 말소리가 다 들렸다.

심지어 마음만 먹으면, 옆 테이블 대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서 친구들이 “쟤들은 싸우나 봐”라고 관심을 보이면 “맞아. 남자애가 어제 술 마신다고 여자 친구 전화를 안 받았대.”라며 그들의 대화 내용을 전달했다.
이렇게 귀가 밝다는 이유로 “와! 저게 들려? 너 소머즈다.”란 말을 듣게 되었다.

소머즈처럼 밝은 귀는 방송작가 시절, 나에게 유용한 무기가 되었다. 스토리텔러는 이 세상에 흩어져있는 다양한 글감들을 모으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사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남다른 청력을 지녔으니 남들보다 글감 수집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는 매일 다른 주제로 오프닝을 써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오늘의 화제나 이슈로 오프닝 멘트를 쓰면 무난하겠지만, 앞서 방송된 프로그램에서 이미 그 소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도 나의 프로그램에서만 얘기할 수 있는 오프닝 소재는 뭐가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 고민을 거듭해도 글감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땐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를 찾았다. 지하철도 좋고, 카페도 좋다. 그곳에 가서 가만히 앉아 눈은 책을 보는 척하면서 귀로는 타인의 대화 소리나 전화 통화를 듣는다.

지하철 저 편에 앉은 중학생 여학생이 학원을 빼먹고 친구와 놀러 가겠다며 엄마에게 허락을 구하는 이야기도 듣고, 카페에서 산후조리원 동기들끼리 모여 앉아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토로하는 푸념도 들어본다.

이렇게 훔쳐들은 사연은 멋진 스토리텔링 소재가 되었다. ‘허락’을 주제로 라디오 오프닝을 써서 청취자들이 저마다 ‘허락’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출산 장려를 권장하면서도 아직은 미숙하고 두려운 아기 엄마들에게 진짜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정부나 제도를 꼬집는 멘트를 쓸 수도 있다.

라디오 방송뿐만이 아니다. 술집에서 중년 남성들이 둘러앉아 가정에서 소외되는 서러움을 털어놓는 것을 듣고 이 시대 ‘아빠’들의 고민을 들어보는 토크쇼를 기획하기도 했고,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목욕탕에서 정치인에 대해 한, 두 마디씩 던지는 아주머니들의 비판의 목소리를 잘 정제하여 토론 방송에서 날카로운 질문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이 외에도 나의 청력으로 찾아낸 방송 소재는 수없이 많다. 지금은 방송 일을 하지 않지만 나의 남다른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과 맛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여보, 저기 뒤쪽 테이블 오늘 결혼 1주년이래”라며 남들의 사연을 전한다. 한 번은 지하철 한편에서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나와 내 수업에 대해 품평하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은 적도 있다. 지금도 나는 ‘소머즈 같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이 능력을 어떤 형태의 글이든 글감 찾기에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의 진짜 숨은 능력은 청력이 아니라 ‘호기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귀가 밝아도 타인의 삶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대화 소리가 들릴 리 없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고민을 하고, 무엇에 흥미를 가지며, 어떤 욕망으로 살아가는지 끊임없이 궁금하니 나의 귀가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소머즈의 귀’는 ‘호기심 천국’인 나의 오지랖을, 그리고 ‘스토리 수집가’가 되고 싶은 나의 욕심을 달리 표현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히어로, ‘소머즈’를 떠올리며 이 미천한 능력으로 지인들에게 들려줄 그럴듯한 이야기 하나쯤은 남길 수 있기를 바라본다.


TV시리즈 <소머즈>의 주인공처럼 뛰어난 청력을 가진다면, 글감 창고가 가득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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