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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Jan 30. 2018

글쓰기 고수에게 훔친 묘사하기 비법

사진을 보듯 글로 생생하게 표현하라!

  

내 주위엔 글쓰기 고수들이 많다.

방송작가는 물론이고 기자, 평론가, 동화 작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등 글로 이름을 알리고 밥을 먹는 진짜 글쟁이들이다.    


나는 예민한 성격인 데다 뭐든 혼자 하는 걸 좋아해서 방송 일을 했던 사람치곤 인간관계가 좁다. 억지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인 셈이다.


그런데 글쟁이들에게는 예외이다. 특히 질투를 느낄 만큼 필력 있는 고수들에게는 먼저 연락을 하고, 밥과 술을 사 가면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애쓴다. 이 또한 그들의 노하우를 훔치기 위한 나의 욕심 때문이리라. 오늘은 그렇게 훔친 노하우 하나를 전하려 한다.

    

방송 스토리텔링을 하다 보면, 구성작가라 하더라도 드라마 대본을 써야 할 경우가 종종 있다. 라디오 작가의 경우, 잠깐이라도 콩트나 단막극이 포함된 코너를 쓸 일이 많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장르를 불문하고 상황이나 사건을 재연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리얼하게 표현하기 위해 드라마 기법을 활용한다.    


그래서 대학 교수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지인에게 드라마나 영화 대본 쓰기를 잘 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추천하는 훈련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학생들이 생각보다 어려워하는 과정이라며 ‘묘사하기 게임’을 제안하였다. 실제 그는 새 학기가 되면 매주 학생들에게 ‘묘사하기 게임’ 과제를 내고 확인한다고 한다.    


'묘사하기 게임’이란, 자신만 알고 있는 인물이나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그리듯이, 사진을 보듯이 말이나 글로 생생하게 들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게임의 규칙이 있다. 바로 절대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은 넣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소심한 남자 친구’를 묘사한다고 하자. 그럼 먼저 얼굴형, 머리 모양, 눈, 코, 입 등의 생김새를 서술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평소 버릇처럼 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긴장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얼굴이나 신체, 행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등을 설명한다.     


글쓴이의 주관적인 생각을 빼고 어떤 사물이나 인물,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이 게임의 핵심이다. “그 카페 분위기가 좋아”가 아니라 시각과 청각, 후각 등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그림을 그리듯이 또렷하게 자신이 떠올린 커피숍을 묘사해야 한다.         


묘사하기 게임이 드라마 작법에 어떤 도움을 줄까?


여러분이 당장이라도 시도해 보면 알겠지만, 어떤 대상에 대해 개인적 감상을 넣지 않고 서술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어디서부터 묘사해야 할지 기준점도 잡아야 하고, 꼼꼼하게 한참을 바라봐야 하며, 구체적이고 정확한 어휘들을 찾아 제대로 사용해야 인물이나 상황을 이해시킬 수 있다. 관찰력과 표현력이 늘 수밖에 없는 방법이다.


묘사하기는 또한 듣는 이, 보는 이에게 상상하는 즐거움을 마련해준다. 드라마에서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인물에 대해 “내 남자 친구는 수줍음이 많고 소심해”라고 직접 말해버리면 얼마나 김이 빠지겠는가! 남자 친구가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거나 여성들이 꽉 찬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뒷걸음치는 모습을 묘사하여 시청자들에게 그 인물에 대해 판단할  근거들을 제공하고, 직접 인물의 특성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방송을 보고, 듣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상상하기의 즐거움 때문이 아닐까?    


꼭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다른 장르의 방송 프로그램을 집필할 때 묘사하기는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마 방송작가라면 누구가 한 번쯤은 묘사해야 할 대상이 바로, ’ 맛’ 일 것이다. 예전에 <6시 내 고향>에서 함께 일한 리포터는 “바다를 입안에 품은 맛”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작가들이 <6시 내 고향>을 거쳐가는 동안, 해산물이 아이템일 때 꼭 이렇게 맛을 묘사한다며, “짭쪼름하다”, “청량하다”, “비릿하다” 등 다양하고 상세한 표현 대신 한결같이 ‘바다의 맛’이라고 뭉퉁거려 쓰는 것이 지겹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즐겨 시청하는 프로그램 중 <냉장고를 부탁해>가 있다. 매주 게스트들을 초대해 냉장고 속 재료로 요리 고수인 셰프들이 게스트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어준다. 프로그램 형식이나 출연 셰프들이 거의 고정되어 있다 보니, 그 회 방송의 재미는 게스트에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게스트가 누구인가가 전체 시청률을 짐작케 한다면, 어떤 요리가 나오고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녹화 분위기나 프로그램의 생동감을 결정짓는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는 맛의 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간혹, 요리를 먹은 후 출연자가 맛 표현에 인색하거나 너무 추상적인 표현을 해서 진행자들이 난감해하고, 요리사들마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를 만난다. 이럴 땐 나 역시, 제작진과 진행자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어 보는 내내 속이 타들어 가기도 한다. 반면, 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향, 입 안에 넣었을 때의 식감, 간의 정도, 음식을 넘긴 후 혀끝에 감도는 맛까지 디테일하게 맛을 묘사하는 출연자들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맛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시청자들에게 직접 그 요리를 맛본 것 같은 상상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나의 지인은 자신만의 글쓰기 비법을 전하며, 수업 때마다 제출하는 묘사하기 과제 때문에 수강생이 줄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훈련법이라 믿기에 게임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그의 확신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다행인 점은, 묘사하기는 연습을 하면 할수록 늘 수 있는 기법이라는 것이다. 지인은 묘사하기를 잘 하고 싶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소설의 첫 장이나 시나리오 또는 드라마 대본의 시작 부분을 꼼꼼하게 읽어보라는 조연도 덧붙였다. 작가가 이야기의 장을 열면서,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등장인물과 주요 배경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자신이 창조한 가상의 세계로 쉽게 빠져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밀한 묘사에 공을 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시, 그와의 만남에서 지불한 밥값은 아깝지 않았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비싼 글쓰기 비법을 또 하나 획득했기 때문이다. 글쟁이들과의 만남은 늘 남는 장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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