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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Feb 13. 2018

독특한 말맛을 살려 개성있는 대본쓰기

곁에서 대화를 나누듯 글을 쓰자!


누구나 자기만의 말버릇이 있다.


주위 사람들을 꾸준히 관찰하다 보면 각자 많이 쓰는 감탄사나 단어, 문장 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말버릇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을 짐작할 수도 있다. “짜증 나”, “진짜 화나게 하네”, “그럴 줄 알았어” 등의 부정적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들과 “괜찮아”, “진짜 대단하다”, “정말 행복해” 같은 긍정적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들은 평소 표정부터 다르다.    


얼마 전 남편이 발견해 알려준 나의 말버릇은 “사실은”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말을 해야 할 때는 “사실은”하고 포석을 깐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릴 때부터 나는 집이나 학교에서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드러내기보다 주위 기대에 맞추려 했고, 아픔이나 싫은 감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했다. 그래서 단번에 나의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진심을 말하는 버릇이 생긴 듯하다.     


예를 들어 “뭐 먹고 싶어?”라는 물음에 “아무거나”라고 답했다가, 메뉴가 정해진 다음에야 “사실은, 나 이거 먹고 싶었어”라고 말한다. 하루 일과를 들려줄 때도 “사실은”하고 운을 떼야,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어”라는 문장을 이어갈 수 있다. 이렇듯 나도 모르게 내뱉는 말버릇이 감추고 싶은 속마음이나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드러내기도 한다.         


방송글은 읽기 위한 글이 아니라, 말하기 위한 글이다.


그래서 쓰는 사람의 개성보다는 이 글을 시청자들에게 직접 들려줄 사람, 즉 사회자나 출연자들의 말맛을 살려 써야 한다. 특히 매일 한, 두 시간씩 청취자들에게 친근한 이야기를 건네는 라디오 DJ를 위한 글쓰기에서는 그들의 말버릇을 관찰하는 일이 필수이다. 그리고 DJ가 말버릇으로 쓰는 단어나 문장 중 일부를 살려 원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쓰면 더욱 좋다. 만약 그 말버릇 가운데 프로그램의 특성에 어울리는 문구가 있다면 잘 살려 슬로건으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2년 동안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DJ는 사석이나 방송에서 “어때?”, “어떠세요?”라고 상대의 의견을 자주 물었다. 난 그녀를 관찰한 후 이 말버릇을 방송원고에서도 잘 살리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오프닝 멘트나 브리지 멘트를 쓸 때 “여러분은 어떠세요?”라는 문장을 살려 결말 즈음에 쓰곤 했다. 제작진의 생각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송이 아니라,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 청취자에게 묻고 그들이 잠시나마 이 주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길 권유하는 방송을 만들고 싶었다. DJ의 평소 말버릇이 ‘대화하듯 마음과 생각을 주고받는 방송’이라는 프로그램의 가치관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 셈이다.          


라디오 원고를 쓸 땐 DJ의 말맛을 살려줄 수 있게 쓰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TV 프로그램에도 저마다의 말버릇 혹은 유행어가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상징하는 문장이 된 “그런데 말입니다”의 경우, 처음에는 “그런데”로 표기되었지만 사회자인 김상중 배우가 보다 정중하고 단호하게 표현하고 싶어 “그런데 말입니다”로 바꿨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이 문장은, 당연하게 보이는 것에 의심을 품고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시사다큐 프로그램의 가치관을 담은 상징적 멘트가 되었다.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는 심층 보도를 전하기 전 늘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담당 기자를 호출한다. 이 문장은 여타의 뉴스 프로그램처럼 한 꼭지씩 뉴스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이슈에 대해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이면까지 들여다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 끼 줍쇼>의 MC 강호동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라는 문구를 매회 반복하여 결국, 소박한 한 끼 식사를 하며 다양한 이웃들과 허물없이 진솔한 얘기를 한다는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하는 유행어로 만들었다.       

 

말하는 대로 현실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스피치 전문가들은 평소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가 운명을 결정짓는다고까지 주장한다. 과장된 표현일지 몰라도, 말이 지닌 힘이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우연히 어떤 단어나 문장을 들을 때, 그 말을 많이 쓰던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 말을 쓰던 사람의 표정과 행동까지 떠오르며 그에 대한 이미지와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습관처럼 무심코 내뱉는 말이 나를, 그리고 내가 만든 방송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물이 될 수 있단 뜻이다.


말맛을 살려 글을 쓰는 일은 꼭 방송 대본을 집필할 때만 유용한 것은 아니다. 나의 주위에는 ‘강의의 달인’이라 불리는 우수한 강사들이 많다. 아나운서 출신으로 발음과 목소리뿐 아니라, 표정과 제스처까지 호감을 사서 단번에 청중을 사로잡는 강사도 있고, 적절한 유머와 열정적인 강의로 어떤 조직에서 강의를 하든 최우수 교수로 선정되는 지인도 있다.


이런 그들이 나를 만나면 글 쓰는 것이 제일 어렵더라는 넋두리를 하곤 한다. 강의를 하라면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할 자신이 있는데, 글로 써보라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럴 땐 ‘역시 하늘이 모든 재능을 다 주지 않는군’하며  속으로 씩 웃는다. 강의를 잘하는 그들이 글까지 잘 쓴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내 그들의 좋은 강의를 글로 남겨 책이나 온라인 상에서 볼 수 있다면, 직접 강의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 우수한 강사들에게 강의할 때 자신의 강의 내용을 먼저 녹음해보라고 권한다. 녹음한 내용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찬찬히 들으며 받아써 보라고 시킨다. 대부분의 강사들이 강의노트나 ppt를 준비하지만, 말할 내용을 요약하는 것과 이미 말한 내용을 되짚어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자신이 말한 내용을 다시 듣고 문서화하는 작업을 통해, 나의 말버릇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논리적 비약은 없는지, 시작은 장대한데 시간에 좇기어 마무리가 급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등을 되돌아볼 수 있다.


말은 한 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하지만 글은 쓰면서 얼마든지 더 적합한 단어로 바꿀 수 있고, 문단의 순서를 이리저리 옮겨볼 수 있으며, 정보나 논리가 취약한 부분은 보충할 수 있다. 자신이 강의한 내용을 초안으로 삼아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식으로 퇴고를 여러 차례 거치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근사한 글이 탄생한다.


나의 조언을 듣고 한 후배는 최근, 자신의 강의 내용을 책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그 책을 수업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의 제약 때문에 수업 중 다 담지 못한 사례나 부연 설명까지 책에 기술할 수 있어서 교재를 읽는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하늘은 불공평한가 보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시간과 공을 들이니, 글도 잘 쓰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나에게 좋은 글이란, 작가를 느낄 수 있는 문장들로 채워진 글이다. 글쓴이의 말투, 가치관, 인생까지 그려볼 수 있는 경험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와 주위 사람들의 말버릇을 귀담아듣고 차곡차곡 모아보려 한다. 말하듯이 쓴 글로 독자 또는 시청자들이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상상에 빠질 수 있다면, 이 또한 글쓰는 이의 기쁨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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