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쓰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여고 동창생인 우리 셋은 참 비슷하다. 좋은 풍경을 카메라 보단 눈에 담으려 하고, 식탐은 없지만 새로운 지식엔 늘 배고파한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겐 관대하지만 나와 내 사람들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그런 친구들이 내 책과 ‘브런치’를 읽었다고 했다. 얼굴 모르는 독자나 안면 있는 주변 사람들이 내 글에 대해 평할 때면 그리 떨리지 않는다. 방송작가 시절부터 매번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글에 대한 평가를 받았고, 매주 시청률이라는 성적표를 받으며 나름 단련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이나 절친에게 듣는 비평은 언제나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혹여 글에 담겼을지 모르는 거짓이나 허세를 곧바로 알아채기 때문이다. 다행히 친구들은 내 글이 읽을 만하다고, 그래서 끝내 다 읽었다고 말했다. 담담히 건네는 친구들의 비평은 내게 누구의 칭찬과 격려보다 힘이 되었다.
방송가에서는 시청자를 ‘중학생 수준’으로 두고 방송을 만들라는 말이 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방송을 만드는 만큼, 중학생 정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과 형식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무난하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얼굴 모를 다수를 상정하고 스토리텔링 하는 것에 반대한다. 독자나 시청자를 구체화하지 않고 쓰는 글은, 어느 부분을 선택하고 어느 부분을 배제할 것인지 기준을 세우기 어려워 자칫, 보편적이고 무난한 스토리텔링으로 흐를 수 있다.
반대로 특정 시청자를 마음속으로 정해놓으면 그 사람에게 들려주듯이 방송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어 강조할 부분이 무엇인지 선택하기 쉽다. 또한, 특정인이 어렵게 느낄 것이라 생각하는 정보는 한 번 더 친절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어, 보다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가 가능하다.
방송작가 시절, 나는 늘 엄마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엄마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셨고, 서른 살에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낸 후 구멍가게를 열고 두 남매를 키우며, 평생 서민의 일상을 사셨다.
그런 엄마가 딸이 방송작가가 되자,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허투루 시청하지 않으셨다. 신기하게도 엄마가 재미있게 봤다고 하는 방송은 시청률이 잘 나왔다. 반면, 딸이 만들었다고 하니 텔레비전 앞에 앉긴 했지만 10분도 안되어 눈이 감기고 급기야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면, 그 방송은 이른바 실패작이 되기 일쑤였다. 엄마의 비평은 나에게 시청률 ‘바로미터’였던 셈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편집 구성안을 쓸 즈음, 엄마에게 “이번에 방송할 아이템은 OO인데 이런 내용이 담겨있어. 어때 엄마?”라고 묻게 되었다.
‘편집 구성안 쓰기’는 그동안 촬영하고 녹화한 내용을 밑재료로 해서 어떻게 하면 최대치의 작품을 만들어낼 것인지 그 비율과 배열을 고민하는 과정이다. 스토리텔링의 방향과 순서, 그리고 소구점을 수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편집 구성안을 쓰기 전에 엄마에게 먼저 스토리를 들려드리면 엄마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식상한 부분, 흥미로운 지점 등을 엄마만의 진솔한 언어로 들려주었다.
“야야, 내용이 너무 어렵다,”, “내가 아는 아줌마 얘기랑 비슷하네. 그런 사람 많다.”, "근데 그걸 누가 보겠나?” 등등......
때론 그 평가가 너무 직설적이고 아파서 심하게 삐지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가 어렵다, 재미없다, 이상하다고 하는 지점들을 다시 한번 고민해서 고쳐 쓰고 나면 훨씬 나은 글이 되었다. 그래서 엄마는 내게 가장 두렵고도 유익한 시청자였다.
지금 글쓰기를 하면서 스토리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어떤 부분을 강조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당신 주위에서 가장 가깝지만 어렵게 느끼는 사람을 독자로 정해 보길 권한다.
그에게 글을 들려준다는 마음으로 써가다보면, 군데군데 날카로운 비평을 날리는 그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솔직하고 애정 어린 비평을 들은 당신은 결국, 마지막까지 한 번 더 고쳐 쓰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