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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Jan 23. 2018

실패의 경험에서 얻은  방송 가이드라인

자문자답의 시간을 갖자!


돌이켜보면 방송을 만들며 실패를 맛봤던 횟수는 그동안 제작한 방송편수만큼이나 많다.


특히 뼈아픈 경험으로 기억되는 몇몇 사례들은 지금까지도 방송작가 업무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그중 하나의 실패 경험을 털어놓겠다. 이 경험은 방송을 제작할 때 보이는 그대로 믿지 말라는 큰 교훈을 준 사건이다.


십여 년 전 휴먼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였다. 당시는 같은 프로그램을 2년 넘게 맡아서 시청률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기에 출연자 선정부터 대본 작성까지 자신감에 차 있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신문의 단신 코너에서 눈에 띄는 인물을 찾아냈다. 부산의 한 시장에서 가게를 얻어 ‘OO밥집’이라는 이름을 짓고 노인분들과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나눠주는 한 스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사람이다!’라는 촉이 왔다. 평소 밥집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내 지하상가에서 탁발을 한다는 기사를 읽고 막연히 스님을 만나러 나섰다. 운이 좋게도 방문한 첫날, 실제로 지하도 한쪽에 앉아 탁발 중인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한 눈매에 중후한 목소리, 몇 마디 나눠볼수록 나의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며칠 후, 스님을 주인공으로 밥집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과 밥집을 찾는 사람들의 사연까지 엮어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쳤고, 편집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인물도 매력적이었지만 촬영 현장의 분위기도 정겹고 따뜻해서 방송 후 밥집을 응원하는  도움까지 이어질 것이란 기대까지 갖게 했다.


하지만 스토리텔러로서 보람을 느끼게 해줄 작품될 줄 알았던 이 방송은 내 방송 인생 최악의 작품이 되었다. 다큐멘터리가 방송된 직후, 방송국으로 여러 건의 항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방송에 나온 스님의 사연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란 것이다.


구체적인 제보 내용은 이랬다. 충청도 어딘가에 살다가 사기 전과자가 된 그는 교도소에서 나온 후 가족들이 받아주지 않자 시골 암자를 돌며 생활했고, 그 후 스님이 되기로 결심하고 불교에 입문했다. 하지만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해 타지에서도 각종 봉사를 한다며 불교신자들을 모은 후, 돈을 빌려 갚지 않았고 이후 소식이 끊겼는데 부산에서 밥집을 운영한다는 방송이 나왔다는 것이다.


헤어진 가족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온 친인척도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 스님에게 돈을 줬다가  받지 못했다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그때 나를 비롯한 제작진들의 당혹감과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끝내 우리는 사과방송을 해야 했고, 불교연합에 관련 사실들을 알렸다. 이후 밥집은 불교연합회에서 운영을 계속하게 됐지만, 기금운용 등에서도 이미 문제가 생긴 후라 문을 닫아야 했다.


이때의 뼈아픈 경험 이후 나는, 방송 아이템을 찾거나 출연자를 선정할 때 다음의 사항들은 점검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도,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정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방송으로 내보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체득한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나만의 방송 지침을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방송도 그러하듯 신문이나 잡지도 어느 한 단면만을 부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다양한 관점과 방향에서 방송 소재에 접근하려고 했다. 평소, 믿고 보는 언론이나 기자의 글이라고 해도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기자나 언론사의 편견 또는 사심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방송 제작진 역시, 색안경을 끼고 촬영 대상자나 관련 이슈를 바라볼 여지가 충분히 있으므로 편파적인 시각은 아닌지, 공정성을 추구하고 있는지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둘째, 방송을 하느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눈빛만 보면, 얼굴만 보면 어떤 사람인지 읽힌다고 자부하던 나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인자한 표정을 가진 출연자라도 실례를 무릅쓰고 꼭 필요한 질문들은 망설이지 않고 묻게 되었다. 특히 평소 친분이 있는 출연자나 유명 인사를 섭외할 때 그의 이력이나 주장의 오류 등을 따져보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처럼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라며 가벼이 넘긴 정보가 프로그램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접근이나 촬영이 쉽고 방송에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좋아서 선정한 아이템이 아닌지 나에게 여러 번 되묻는 과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섭외를 위해 전화를 했는데 단번에 흔쾌히 촬영을 허락하면 반갑기보다는 불안함이 앞섰다. 혹시 방송을 홍보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에게 의미나 재미를 줄 수 있는 더 나은 촬영 대상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지침을 만들었지만 이후에도 거의 매주 나의 실패와 실수는 계속되었다. 촬영 직전, 섭외한 출연자가 갑자기 사라져 방송 펑크의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고, 카메라 없이 만날 때는 얘기를 술술 이어가던 출연자가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니 입을 굳게 다물어 진땀을 흘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그렇게 실패의 경험들이 늘어갈수록 방송작가로서 실패에 대처하는 기술들도 하나씩 늘어갔다. 내가 실력이 좋은 방송작가였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루하루 스토리텔링 능력이 조금씩 늘어가던 작가였다고 얘기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비결은 바로, 나에게 쓰라린 상처를 준 수많은 실패의 상황과 사람들 덕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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