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켈레와 파리오케스트라 : 프랑스 관현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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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이날의 공연으로 돌아가 보자.
파리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무대, 과연 어땠을까?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일까.
아니면 내가 메켈레에게 스스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 버린 걸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1부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이었다.
이것이 파리 오케스트라의 덕인지, 지휘자의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감상자의 입장에선 정말 좋았다.
그 중에서도 '미녀의 파반느'와 '미녀와 야수'는 단연 돋보였다.
미녀의 파반느는 동화의 책장을 여는 듯한 꿈결 같은 감정의 순간이었다.
무대를 가르는 첫 소리는 플루트.
그 한 줄기 소리는 정말 기가 막혔다.
가벼운 바람이 얇은 커튼을 스치는 듯한 음색, 그것은 플루트가 낼 수 있는 가장 투명하고 조심스러운 빛깔이었다.
그 음이 홀 전체에 번지던 찰나, “아, 역시 파리 오케스트라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미녀와 야수에서는 관악기들의 교차가 발군이었다.
클라리넷과 바순이 서로를 응시하듯 이어지는 대목, 그 색감은 하나같이 깃털처럼 가벼웠고, 투명한 수채화 붓터치처럼 섬세하고 우아하게 악기별 색깔이 겹겹이 쌓였다.
4분여의 짧은 악장이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오늘 공연에서 가장 ‘파리 오케스트라‘다운 순간은 아마 이 짧은 동화 속이 아니었을까.
2부의 무대는 생상스의 교향곡 제3번, 이른바 "오르간 교향곡”이었다.
이 작품은 화려하면서도 장대하며, 생상스의 유산이 응축된 하나의 기념비와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내가 메켈레에게서 기대하던 장점들, 구조적 긴장감, 투명한 층위, 파리 오케스트라의 색채감이 이날의 무대에서는 그다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가진 빛나는 개성이 이날의 연주에서 온전히 발휘되었는지에 대해선, 끝내 의문이 남는다.
메켈레는 이날 오르간을 그저 단순한 하나의 악기로, 하나의 색채로 다루었을 뿐이다.
2악장 서두에서 오르간은 공간을 압도하는 깊은 숨결이라기보다, 단순히 오케스트라 질감 속에 부드럽게만 녹아드는 음향으로만 존재했다.
마지막 4악장에서도 피아노와 함께 곡의 구조적 축을 세우기보다는 그 많은 성부들 중 하나의 층위를 차분히 덧칠하는 정도에 머문 듯했다
물론 이는 메켈레 특유의 투명하고 정제된 사운드의 미학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곡이 본래 지닌 매혹은 ‘대결 구도’에 있다.
인간적 생동감(피아노와 오케스트라)과 초월적 장엄함(오르간)의 충돌이 불러오는 장엄한 서사, 드라마 말이다.
이날의 무대에서는 그 긴장과 맞부딪힘이 희미하게 희석되며, 기대만큼의 울림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오르간의 서주로 시작되는 2악장은,
본래 먼 배경에서 스며드는 종교적 침묵의 상징처럼 경건하고도 깊게 울려야 한다.
그 울림은 음량이 크지 않더라도 홀 전체를 압도할 만한 깊이와 무게감을 지닌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날의 음향은 그저 정제된 채로 조용히 흘러갔고, 내게는 바닥까지 가 닿는 울림을 전해주지 못했다
이어 등장하는 현악기의 긴 호흡, 서정적인 주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본래 숨결처럼 오르내리며 내면의 시간을 열어젖히는 듯한 음악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날의 흐름은 무난히 흘러갔을 뿐, 곡선형의 선율이 가진 유려함이나 리듬감은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다.
메켈레의 장기라 믿었던 지점, 현대적이면서도 전통을 훼손하지 않는 균형감각, 명료함 속에서 피어나는 생동감, 이 모든 것이 2악장에서는 어쩐지 밋밋하게 사라져 버렸다.
4악장에서 피아노는 음악에 반짝이는 빛의 입자를 흩뿌리면서, 그 섬광은 순간의 감정, 인간의 호흡과 심장의 고동을 조용히 담는다.
반면 오르간은 무대를 가로지르는 장중한 기둥, 그 위에 전체 건축을 세우는 돌기둥이어야 한다.
두 악기는 결코 조화롭게 섞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밀어내며 긴장 속에 울려야 한다.
생상스가 굳이 피아노와 오르간을 나란히 배치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피아노는 순간의 생동감을, 오르간은 시간의 느림과 영원의 무게를 상징한다.
이 양가적 긴장이야말로 이 작품의 숨결이자 심장이다.
피아노는 순간적이고 리듬 중심이라 감정의 외면적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반면 오르간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고유의 음향으로 영적 또는 철학적 깊이, 시간의 느린 흐름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이런 면에서 이날 메켈레의 해석은 피아노,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의 ‘대립적 구도’를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다.
피아노는 순간마다 또렷한 색채를 흩뿌려야 했지만, 그 울림은 지나치게 약해 음향 속에 묻혀버렸다.
오르간은 등장할 때마다 공간을 압도하기보다는 독립된 성부처럼 따로 부각되었고,
결국 두 악기가 서로 긴장을 주고받는 대신, 오르간은 단순히 전체 질감 속에 스며드는 또 하나의 색채로만 머물렀다.
이 곡의 본질은 화려한 외피 뒤에 숨은 장엄함, 춤추는 리듬감 뒤에 응축된 깊이를 드러내는 데 있다.
그러나 이날의 해석에서는 그 연속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오르간이 장중한 기둥을 세우고, 피아노가 그 주위에서 불꽃처럼 반짝이며 맞부딪혀야 할 자리에 오르간만 홀로 무게를 지니고 버티는 듯했다.
그 결과 메켈레의 장기인 ‘현대적 긴장감과 리듬감 있는 호흡’도 다소 희미해졌다.
그의 지휘에서 흔히 기대되는 명확한 비트감, 서늘한 구조 속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뜨거움은 이날의 4악장에서만큼은 다소 눌려 있었다.
엄숙함과 정제는 있었지만, 그 뒤에 숨어서 나와야 할 생상스 특유의 역동적인 힘은 끝내 터져 나오지 못했다.
연주는 적당한 정도로 훌륭했으나,
내가 기대했던 메켈레와 파리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색채 속의 웅장함은 아니었다.
노트르담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찬란함 속에 경건함이 공존하길 바랐지만, 그 빛과 깊이는 끝내 부족했다.
화려함의 표면은 있었으나, 그 안에서 빛이 번져 나오는 듯한 영적 깊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성향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이끌며, 한 악단의 고유한 색채를 짙게 끌어내지 못한 탓일까?
무대 위의 젊고 넘치는 에너지와는 달리, 이날의 음악은 오히려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였다.
전체적으로 1부의 연주가 더 빛났고,
2부의 오르간 교향곡은 지난번 오슬로 필과 내한했을 때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에 비하면 분명 아쉬움이 남았다.
음악이 진정한 감동을 주는 순간은, 잘 정제되고 제어된 구조를 넘어, 제어되지 않는 어떤 정서가 불현듯 터져 나올 때가 아닐까.
연주가 단순한 음의 반복이 아니라, 오직 그때만 존재하는 비가역적적인 일회성으로 그때만의 영감으로 존재해야 한다면, 이런 면에서 오늘의 생상스는, 그 선을 끝내 넘지 못한 연주였다.
그러나 이 모든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메켈레의 공연은 가는 길부터가 설레는 경험이다.
그 젊음과 에너지가 무대 위에서 시각적으로도 관객을 사로잡고, 곡의 구조를 한눈에 들어오게 만드는 명료함은 여전히 그의 강점이다.
다만 오르간 교향곡처럼 ‘극적인 대립’을 품은 작품에선,
그의 절제된 미학이 한 번쯤 폭발로 변하는 순간을 보고 싶다.
그래서일까.
나는 건널 수 없는 연주의 강을 바라보며,
끝내 닿지 못한 음악의 깊은 울림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흘러가버린 소리의 색채를,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며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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