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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의 멘델스존과 겨울 숲의 라흐마니노프

멘델스존 바이올인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by 헬리오스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연주회를 다녀온 후 가장 깊이 남은 순간들을 함께 들여다본다.


막은 내렸지만, 음악은 여전히 흐른다 : 연재 (20)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 김봄소리 & 얍 판 츠베덴


가을빛의 멘델스존과 겨울 숲의 라흐마니노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이번 정기연주회는 가을 저녁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채 열렸다.

무대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와 지휘자 얍 판 츠베덴이 함께했다.

전반부에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후반부에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 연주되었다.

두 작품은 그 자체로도 대비적이지만, 이날의 해석은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가는 듯한 흐름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멘델스존 협주곡 – 성숙한 여운, 그러나 아쉬운 균형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봄에 어울리는 곡이다. 맑고 투명하며, 젊은 기운이 흐른다. 그런데 의외였다.

이 가을, 그것도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10월 저녁에 이 곡을 듣게 될 줄이야.

아마도 김봄소리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선택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무대에 선 김봄소리는 이미 ‘봄의 소리’라는 이름 속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의 멘델스존은 단순히 선율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신예 연주자의 싱그러움에 기대지 않는다.


1악장의 첫 선율에서부터 드러난 비브라토는 농밀하면서도 과장되지 않았고, 소리가 끊어질 듯 멈추는 순간마다 홀 안에는 긴장과 정적이 깃들었다.

그 정적은 곧 깊은 여운으로 전해지며, 그녀가 한층 성숙한 음악 언어를 획득했음을 입증했다.

카덴차에서 드러난 기교 또한 인상적이었다. 화려하지만 불필요하게, 번드르르하게 치장하지 않고, 음표 하나하나가 그녀의 숨결과 맞물려 자연스레 흘렀다.

중간중간의 섬세한 터치와 음색의 변화는 곡을 감칠맛 있게 만들었고, 청중은 단순히 ‘기교의 멋’을 넘어, 무르익은 해석에서 오는 풍성하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협주곡에서도 아쉬움은 있었다.

몇몇 대목에서 오케스트라의 음량이 커지면서, 바이올린의 섬세한 선율이 묻히는 순간이 있었다. 특히 1악장의 전개부와 3악장의 경쾌한 흐름에서 그러했는데, 김봄소리의 세밀한 결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을 남겼다.

협연 무대에서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의 균형은 늘 중요한 과제인데, 이날은 바이올린이 한 발 뒤로 물러난 듯한 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김봄소리의 멘델스존은 성숙함과 따뜻한 여운이 가을의 황금빛처럼 번지는 연주였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 서정으로 물든 츠베덴


후반부의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이날 공연의 정점을 이루었다.

가을이 채 물러가기도 전에 겨울의 그림자를 불러오는 듯한 쓸쓸한 교향곡이다.

특히 지휘자 츠베덴의 해석은 그동안의 이미지와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그에게서 종종 드러난 강한 박자감과 밀도 높은 템포에 의한 여백 없는 연주 대신에, 이날은 의외로 서정이 전면에 부각된 연주를 들려주었다.


1악장은 차분하고 단단했다. 지나치게 빠르지도 무겁지도 않은 템포 속에서 각 악기 파트가 뚜렷한 결을 드러냈고, 츠베덴은 그 결들을 촘촘히 엮어내며 서늘한 긴장감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었다.

음 하나하나가 또렷이 붙잡혀 있으면서도, 선율들 사이에 호흡이 살아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가을 저녁의 공기처럼 차갑고도 맑았다.


세상의 수많은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3악장, 이날의 연주 중에서도 단연 백미라 할 만했다.

목관과 현악이 이어내는 서정적인 선율은 청중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 순간 음악은 단순한 선율이 아니라 풍경으로 다가왔다.

마치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 속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끝없이 뻗은 하얀 줄기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이고, 바람이 불어 고요를 흔드는 장면.

서울의 가을밤에 앉아 있었지만, 청중은 이미 겨울 숲의 고독을 함께 보고 있었다. 홀 안은 숨죽인 듯한 정적 속에서 깊게 잠겼고, 이 그 서정의 중심에는 츠베덴이 있었다.


4악장은 그 모든 서정을 한순간에 태워버렸다.

현과 금관이 겹겹이 쏟아져 나오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장식적 화려함이 아니었다.

가을의 낙엽이 한꺼번에 불타올라 재로 흩어지는 듯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 거대한 불꽃은 결국 사그라들었고, 남은 것은 황량한 겨울 들판 같은 고요가 홀 안에 찾아왔다.


공연장을 나서며...


이날 서울시향의 무대는 두 개의 대비적 풍경을 남겼다.

김봄소리의 멘델스존은 성숙한 비브라토와 섬세한 여운으로 가을빛의 과실처럼 무르익은 맛을 보여주었고, 츠베덴과 서울시향의 라흐마니노프는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거대한 서정의 장면을 펼쳐냈다.

무엇보다 츠베덴이 보여준 의외의 부드러움과 서정적 해석은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한층 깊어지고 넓어지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 바깥공기에도 이미 한 발 더 깊어진 계절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날의 음악은 그저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청중에게 계절의 흐름을 체험하게 한 시간이었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연주 소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면, 그의 서정이 가장 순도 높게 피어나는 레오니드 코간과 로린 마젤의 연주를 권하고 싶다.

그들의 해석에는 어떤 꾸밈도 없고, 오직 투명한 선율의 진심만이 흐른다.

바이올린의 한음 한음이 너무 섬세해서 듣다 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연주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날로그 전성기의 녹음이지만 이 음반의 음질은 다소 거칠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녹음 탓인지 마스터 테이프 열화 때문인지 좋은 복각이 아직까지는 없다)

그러나 그조차도 나에게는 세월의 숨결처럼 들려, 오히려 이 연주의 순수함을 더 또렷하게 들려주는 듯하다.


Felix Mendelssohn Bartholdy :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Leonid Kogan (1924 -1982), Violin

Lorin Maazel (1930-2014), Conductor / Radio-Symphonie-Orchester Berlin

Recorded 13th to 15th November of 1974, in Grunewaldkirche, Grunewald, Berlin, Germany.


https://youtu.be/8xTdcuFPYb8?si=zumVrcK1VfXfbRGX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이 곡은 따뜻하고 벨벳 같은 서정의 정수를 들려주는, 오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권하고 싶다. 이 연주는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적 서정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먼디의 라흐마니노프는 “소리로 빚은 향수”라 할 만큼 부드럽고 감미롭다.

3악장은 필라델피아 현악기의 윤기 나는 사운드 속에서 녹아내리듯 흐른다. 선율이 노래하듯 이어지고, 목관은 인간의 숨결처럼 따스하다.

슬픔보다는 그리움, 비탄보다는 회상의 색조가 짙은 연주다. 음악이 끝나면 우리는 마치 오래된 사진첩의 추억을 다정하게 꺼내 본 듯한 감상에 젖는다.


Rachmaninoff : Symphony No. 2 in E minor, Op. 27

Eugene Ormandy (Conductor) / Philadelphia Orchestra


https://youtu.be/wP2Of7p6wbU?si=-j7l6MfUwKbb0IBr


* 이날 공연은 10월 2일 예술의 전당에서의 펼쳐진 서울시향 정기연주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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