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연재 (9)
이번에는 피아노 음악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한 곡 안에서 단번에 체험하게 해주는 작품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Op.23 No.5,
피아노가 인간의 감정과 혼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이곡은 단순히 피아노의 화려함이나 기술적 자랑이 아니라,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음 하나하나의 생명과 호흡, 그리고 그 사이사이 느껴지는 여백과 침묵까지를 포함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곡의 시작, 단단하게 걸어가는 장조의 행진은 곧장 청중의 심장을 두드린다. 규칙적이면서도 힘찬 리듬과 강렬한 화음이 만들어내는 긴장은 단순한 듣는 즐거움을 넘어 청중의 온몸을 곡 속으로 끌어들이는 몰입감을 준다.
그러나 그 긴장만이 전부는 아니다. 곡 중간부에 등장하는 흐르는 아르페지오와 부드러운 선율은 숨을 고를 틈을 준다. 그리고 피아노의 음 하나하나가 공간 속에서 흩어지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청중들에게 순간적으로 자신도 곡 속을 떠다니는 듯한 착각을 경험하게 한다.
이렇게 격정과 서정, 긴장과 이완이 교차하며, 곡 전체는 살아 움직이는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곡이 전하는 즐거움은 피아노 음악의 본질적 즐거움—청각적 쾌감, 감정적 몰입, 그리고 상상 속 공간을 걷는 체험—그 자체이다. 행진의 장엄함 속에서 힘과 속도를 느끼고, 부드러운 선율 속에서는 마음을 맡기며 감정을 음미한다.
피아노의 음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어, 순간마다 우리가 곡 속을 걷고 호흡하는 듯한 체험을 안겨 준다.
곡은 단순한 기술적 기교를 넘어 인간 내면의 긴장과 갈망, 그리고 일시적인 해방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곡이 지닌 행진의 힘과 서정의 섬세함, 그리고 피아노 음악의 살아 있는 즐거움을 가장 입체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연주 가운데 하나가 유자왕의 연주다.
그녀의 건반 위에서 이 곡은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녀의 연주는 이 곡이 지닌 극적인 대비를 누구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며, 그 속에서 음악의 즐거움을 한층 더 깊고 강렬하게 이끌어낸다.
왼손은 묵직하게 땅을 박차며 행진의 리듬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오른손은 그 위를 유영하듯 자유롭게 선율을 펼친다. 순간순간 강한 타건과 섬세한 터치가 교차하며, 청중은 건반 위에서 펼쳐지는 속도와 힘, 동시에 은은한 감정의 흐름을 느낀다.
그녀의 터치는 곡의 강약과 속도를 섬세하게 조율하며, 격정과 서정, 긴장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살아 숨 쉬게 한다. 힘 있는 타건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심장의 박동처럼 울리고, 유려한 아르페지오는 공기 중으로 퍼지는 숨결처럼 흐른다.
나는 그녀의 연주 속에서 피아노가 전하는 감정과 공간을 직접 체험하며, 피아노 음악의 단순한 소리를 넘어 피아노 예술의 본질적 즐거움에 다가서게 된다.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Op.23 No.5는 그래서 단순한 피아노 곡이 아니다.
이 작품은 피아노가 줄 수 있는 감각적 쾌락과 감정적 몰입, 그리고 인간적 체험을 하나의 유기체처럼 엮어낸 음악이다. 격정과 침묵, 긴장과 완화,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숨결과 여백 속에서 나는 피아노 음악의 참된 즐거움을 깨닫는다.
이 곡을 듣는 순간, 나는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감정을 몸으로 체험하며, 피아노와 함께 호흡한다.
라흐마니노프가 보여주는 행진의 힘, 서정의 부드러움, 긴장과 완화의 조화, 그리고 그 사이에 스며든 숨결과 침묵은 피아노 음악이 줄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체험—을 나에게 선사한다.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손끝과 귀, 그리고 마음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 속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우리에게 그 진실을 강렬히 보여준다.
왼손이 땅을 딛고 흔들리며 박차 오르듯이 연주될 때,
오른손이 하늘을 그리워하며 가볍게 비행하듯 길을 열 때,
그리고 그 둘이 만나 잠잠히 잦아들 때, 낭만과 결단이 교차한다.
그 사이사이에서 사라져 가는 리듬, 남는 여운, 메아리 없는 울림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이곡은 말한다.
https://youtu.be/GhBXx-2PadM?si=3S5GuYun_0pu3C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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