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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 빗방울 전주곡 Op.28 No.15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연재 (10)

by 헬리오스

어설프지만 진지한 클래식 음악 듣기-연재 (10)


쇼팽 : 빗방울 전주곡 Op.28 No.15


쇼팽 <빗방울 전주곡> — 기다림의 심장, 그리고 불안한 고요


1838년 겨울, 마요르카 섬 발데모사의 수도원.

차가운 돌벽 사이로 빗방울이 흘러내리고, 피아노의 현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상드와 그녀의 아들은 폭우 속에 외출한 채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과 병약한 육신의 떨림 속에서, 쇼팽은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한 음을 눌렀다.

D♭ — A♭ — D♭ — A♭ …
한 음이 떨어질 때마다 창문 밖의 빗소리와 겹쳤다. 그것은 단순한 리듬이 아니라 기다림의 심장박동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리듬은 점점 그의 내면으로 스며들었다.
반복은 고요하지만, 고요 속에는 불안이 깃들어 있다.
그가 만든 선율은 마치 물결처럼 피어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고, 그 위로는 보이지 않는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음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비가 그치지 않는 오후처럼, 정지된 듯 흐르는 시간의 감옥이다.


이 곡의 중간부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단조(短調)의 폭발은, 쇼팽의 마음속에서 솟구친 절망의 폭우이다.
반복되던 빗소리가 한순간 폭풍이 되어 들이닥치고, 감정은 제어를 잃는다.
그러나 그 절정은 길지 않다. 감정의 불꽃이 꺼진 뒤 다시 처음의 잔잔한 리듬이 돌아오지만, 그것은 더 이상 같은 빗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감정이 소진된 뒤의 고요,
사랑하는 이를 향한 끝나지 않은 내면의 기도고 체념의 음악이었다.


며칠전만 해도 하늘에는 단풍이 풍성했고, 땅에는 낙엽이 수북했지만, 이제는 단풍이 찬란한 곳을 찾기 힘들다. 벌써 옷깃을 여미며 겨울을 바라봐야 할 시기가 되었다.

이런 계절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가을 저녁은 쇼팽의 ‘빗방울전주곡’을 듣기에 더욱 제격이다


이 에피소드가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곡이 실제로 ‘기다림의 심리’를 완벽히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 음악에 작은 이야기를 넣기를 좋아하고 그 이야기 따라서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 일정한 리듬의 반복은 단조로움이 아니라 불안의 지속이며, 중간부의 폭발은 감정의 분출, 다시 돌아온 평온은 체념의 승화다.


그래서 이 곡은 피아노 음악이 어떻게 인간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멋진 예다.

우리는 단지 빗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한 인간의 불안과 체념의 심장박동을 듣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음이 사라진 뒤에도,
그 빗소리는 귀 속에 남는다.
그것은 단순한 물방울의 소리가 아니라,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향한 끝나지 않는 기다림의 메아리다.


상드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 그는 여전히 그 반복되는 음을 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기 안의 비를 멈추게 하려는 사람 같았다.”


많은 '빗방울 전주곡' 연주가 있지만 늦가을 저녁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연주는 단연 소콜로프다


소콜로프의 연주는 이 곡의 이런 이야기를 마치 시간의 드라마처럼 풀어낸다.
그의 피아노에서는 음 하나하나가 결코 장식되지 않는다.
초반의 반복 리듬은 일정하지 않다. 살짝 흔들리고, 약간씩 늦어진다. 마치 인간의 심장이 불안 속에서 맥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그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음은 젖은 빛처럼 탁하지 않지만, 투명하게 울리지도 않는다.
그 사이에 미묘한 탁음(濁音)이 스며 있고, 그것이 곡 전체를 인간적인 떨림으로 감싼다.

중간부에 들어서서도 그는 음을 쏟아내지 않는다. 대신 심연으로 빨려들 듯이 음량을 눌러 다듬는다.
격정이 아니라 내면의 포효, 폭발이 아니라 절제된 통곡이다.
그의 빗소리는 점점 멀어지며, 남는 것은 오직 시간의 흔적뿐이다.

이렇게 소콜로프는 쇼팽의 불안이 외침이 아닌 침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곡은 피아노가 낼 수 있는 소리의 극단을 탐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리와 침묵의 경계에서, 음과 여백의 간격 속에서 살아 숨 쉰다.

그 미세한 진동 속에서 청중은 피아노의 ‘소리’가 아니라 ‘숨결’을 듣는다. 그것이 바로 이 곡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이지만, 때로는 고통이다.
음악이 인간의 불안, 기다림, 그리고 사랑의 체험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그의 음들은 공기를 두드리지 않는다. 오히려 공기 속에 스며들어, 우리의 내면 어딘가 잊히지 않는 기억을 건드린다.

곡이 끝날 무렵, 마지막 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요만이 남는다.


소콜로프의 〈빗방울 전주곡〉을 듣고 있으면,
그의 피아노가 비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을 연주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그것은 쇼팽이, 그리고 소콜로프가 동시에 들었던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시간의 끝없는 빗소리’이며,

우리 각자에게도 잊을 수 없는 한 계절의 기억을 되살리는 순간이다.



Chopin Prelude Op. 28 No. 15 in D flat major "Raindrop"

Piano : Grigory Sokolov


https://youtu.be/dZz_OcJNFuc?si=J1VSMD-6X-1WuX0Y


최근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연주가 있다.

2025년 10월 쇼팽 콩쿠르에서 나카가와 유메카가 들려준 전주곡 15번, 이른바 ‘빗방울’의 순간을 떠올려 보라.


비록 결선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녀가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인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쇼팽에 가까웠다. 그녀의 ‘빗방울’은 콩쿠르라는 형식을 뛰어넘어, 듣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조용히 적시며 오래 남는 감동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연주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콩쿠르라는 냉철한 무대에서는 다소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감정의 격류였지만, 정작 그 눈물은 음악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 하나하나에 더 절실함을 더해주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음은 마치 200년 전의 쇼팽이 잠시 그녀의 육체를 빌려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 듯한 울림이었다. 쇼팽의 숨결과 떨림, 기다림과 고독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빗방울’은 연주가 아니라 체험이 되었고, 음악이 왜 여전히 인간을 울리고 구원하는지에 대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증명이었다


Chopin : Preludes, Op. 28 No. 15 in D flat major "Raindrop"

YUMEKA NAKAGAWA – second round (19th Chopin Competition, Warsaw)


https://youtu.be/zXi1PZuy4JA?si=W7qT4w1ta34p3M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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